본문 바로가기

말씀연구

내가 읽은 로마서



1 당시 로마에서 최고 권력자는 황제의 종이다.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선지자에 해당하는 택함 받은 자로 밝히는 바울은 자신이 전할 복음의 정통성으로 스스로 변호한다. 실제적인 명함이나 감투가 아니라 조금 재밌고, 용감하다.
2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전하는 것이다. 예수로 인하여 은혜와 사도 직분을 받았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열방이 믿어 순종하게 한다. 너희도 부르심 받은 성자다.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그것은!
3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 이런 유의 인사말은 설득 서신에 사용되었다. 바울이 스스로를 내세우며 설득하고 싶은 것들은 성도 간의 화목이다. 이 순수한 저자는 진짜 은혜와 평강을 바란다.(롬1:1-7)

1 만난 적은 없지만,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 감사하다. 너희를 기억하며,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너희를 만나길 바란다. 너와 나의 믿음이 서로를 평안하게 한다. 만나서 열방 가운데 함께 열매 맺고 싶지만 길이 막혔다.
2 인종차별이 심한 헬라문화 가운데, 이 복음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실함으로 나타나는 바(합2:4), 신실한 삶이 믿음 있는 삶을 만든다. 이로써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1:8-17)

1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써 그 능력과 신성을, 곧 그 존재를 너희에게 이미 나타내셨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
2 너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경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욕이 서로를 욕 되게 내버려 두신다.(롬1:18-25)

1 이방인의 죄로서 우상숭배와 동성애가 중요해 보인다. 우상숭배가 원인되어 동성애가 만연하다는 인식은 헬라문화의 문제점을 부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동성애는 다른 유대인의 문제를 언급하기 위한 대조군일 뿐이다. 
2 유대인들의 죄들, 불의, 추악, 탐욕, 악한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원한,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신, 사랑 없음, 무자비 등 이상은 사형이라 하나님이 정한 것들이다. 그런데!
3 유대인들은 이런 죄를 알고도 행하고, 행하는 자들을 옳다 말한다. 하나님은 이들을 그저 내버려두신다.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않고 죄악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 주님이 주신 지옥이다.(롬1:26-32)

1 철학자들과 유대교사들 모두 언행일치를 중요시 했다. 판단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도 올바르게 살지 않는데 있다. 무엇이 정의인지 잘 알면서도 불의를 반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
2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 영광, 존귀, 평강이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 분노, 환난, 곤고가 있다. (롬2:1-11) 구원이 삶과 무관할 수 없다.

율법이 없어도 망하고, 율법이 있어도 망한다. 
율법은 듣는 것이 아니라 지켜 행해져야 의롭게 되는 것이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 양심이 증거가 되어 율법의 행위로 나타난다. 
곧 이로써 심판에서 율법을 행하지 아니한 너희는 분명해 진다. 양심이라도 있으면 행하거니와 율법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너희는 심판 대상이다. 
너, 유대인아.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야. 스스로 선생이라고 믿는 자들아.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에게 모독 받는다. (롬2:12-24) 
기독교는 왜 망하는가? 기독교는 탈 율법적이고 이교도적인 신앙으로 망한다.

할례가 중요한가? 율법이 중요한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진정한 할례이며, 마음에 할례이다. 할례 받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 행하며 종교적 유대인이 아니라 실제적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롬2:25-29)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는 없다.

유대인의 특권은 말씀을 맡은 것이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불성실하기 때문인가?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냈다고 하나님이 불의하시기 때문인가?
거짓말이라도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것은 정죄 받지 않고, 
이에 대해 선을 위해 악을 행했다고 비방한다면 정죄된다.
(롬3:1-8)
유명 목사님의 글이 생각난다. 말 좀 거칠게 했다고 정의로운 행동을 싸잡아 욕해서야 되겠는가? 도덕적으로도 품위 있어지려고 하기 전에 정의를 알고 행해야 하는 것이 먼저다.

그렇다고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 죄 아래 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율법을 안다는 유대인들이 입으로 행하는 악독을 발 빠르게 행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평화의 길을 모르는 채로 행하는 것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바, 율법은 악독을 행하는 입을 막는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모든 세상이 율법을 따르게 한다. 
율법 앞에 의롭다고 주장할 사람이 없다. 율법 앞에 죄를 깨달으라.
(롬3:9-20)
선을 행하라. 율법을 지켜 행하라. 죄의 삶에서 의의 삶으로 옮겨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공의, 공평한 분배를 이루신다. 
죄의 노예에서 예수가 은혜로 해방시키시고, 영광에, 공의에 이르게 하신다. 
전에는 참으심으로, 이제는 예수의 피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리하여 예수 믿는 자도 공의롭게 하신다. 
율법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행위와 믿음이다. 믿음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더 강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다. 
할례자나 무할례자 모두 새 율법, 예수를 믿고 행함으로 하나님이 정의롭다 하신다. 
따라서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우는 것이다. (롬3:21-31)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가 갖는 문제점을 이미 알고 경계하고 있다.

유대 교사들은 faith(믿음)를 faithfulness(신실함)로 해석하여 행위 중 하나로 보았다. 바울은 faith에 체불금을 지불한다는 의미로 쓰였던 '여기심'이란 단어를 사용해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바울의 강조는 칭의가 행위도, 육신도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할례 전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인에게는 불편한 이 사실을 공개한다. 
더 심각한 사실로 유대인들에게 여겨졌을 문제는 이 하나님의 칭의는 불법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시며, 심지어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죄의 율법으로가 아닌 구원과 해방으로의 율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율법은 칭의를 위해 존재했던 것이지 지옥에 내던지기 위한 잣대가 아니다.(롬4:1-12)

땅을 기업으로 받는 언약의 상속자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 
상속자가 율법으로 정해진다면 믿음은 무슨 소용인가? 율법은 그저 죄를 알게 하는 것이지 은혜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상속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정되기 위해서 믿음으로 가능해야 한다. 이는 약속을 더욱 굳건히 붙들게 한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창조하시는 분으로 믿었다. 
백세가 되도, 사라가 잉태하지 못해도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확신했다. 
그래서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의로 여기심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가 가운데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에게도 있다. 
의로 여기심은 은혜다. 선물(先物)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내어줌이 되어 죽으셨고,
우리가 의로 여김을 받도록 살아 나셨다. 
(롬4:13-25)
최초에 기업을 주신 것도, 칭의를 얻는 것도 선물이다.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은 자들아
예수의 피로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자.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는 은혜에 들어간다.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 가운데 환난에서 소망을 이룬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된 것임을 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않을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예수가 하신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 (롬5:1-1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렀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친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 한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은혜와 선물이 가득히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한다.
한 사람이 불순종해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된다. 
한 사람이 순종해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 
예수로 말미암아 전에 죄가 사망에서 왕노릇 하듯이 은혜와 의로 왕노릇 하며 영원히 살리라. 
많은 범죄로 인하여 은혜의 선물이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고
죄가 늘어난 곳에 은혜의 선물이 넘친다. 
(롬5:12-21)
예수의 의는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다. 죄인에게 가는 선물이다.

유대인의 세례는 전인격적인 회개를 의미한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함은 그 죽으심에 참예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음의 모양도, 예수와 함께 부활의 모양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라.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산다. 
예수와 함께 죄를 이기고 부활한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스스로 여겨라. 
(롬6:1-11)

죄의 지배를 받아 불의의 무기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 의의 무기로 의의 무기가 되라.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면 죄를 지을 수 없다. 
죄의 종이 되면 사망에, 순종의 종이 되면 의에 이른다. 
교훈의 본을 순종하면 죄에서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된다. 
몸이 부정과 불법에 있으면 불법에, 의에게 종으로 내주면 거룩함에 이른다. 
죄의 열매는 부끄러움이며 그 마지막은 사망이나 의의 열매는 거룩함이며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영생이다. 
(롬6:12-23) 
율법을 떠난 모호한 의가 아니라 은혜 때문에 그 위에 서는 구체적이고 순종적인 의!

법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만 그 위에 군림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가도 간통법이 걸리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려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법에 대하여 죽었다.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려고 법으로 말미암아 죄성이 살아 움직이게 했었지만. 
법에 얽매인 삶에서 해방을 얻으라. 돌판을 섬기지 말고, 새로운 것을 섬기라. 
(문자적 해석을 했던 유대인과 달리 헬라인은 문맥적 해석을 했다.)
율법을 죄를 알게 한다. 율법,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그런데 계명을 이용해 죄가 탐심을 이루고, 스스로 죽는다. 
율법을 알게 되면서 죄가 살고 내가 죽었던 것이다. 
(롬7:1-12)
나는 죽음으로 이끄는 법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이끄는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전하는 자로 새로운 법으로 세상 위에 서야 한다.

율법은 선한 것이다. 
율법은 죄를 분명히 하는 것이지 죽게 하지 않는다.
율법은 신령한 것이다.
육신이 약하여 죄를 범한다. 
율법은 선한 것이다. 
범죄하는 이유는 율법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다. 
육신에 선이 없다. 
선행하기 원하지만 악행을 한다. 
그렇다. 선행하기 원하지만 악행을 한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은 죄의 법에 사로 잡혀 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긴다.(롬7:13-25)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구분되어 있다. 죄의 법이 시대적 율법이라면 하나님의 지속가능한 율법이 아닐까? 하나님 나라에 이 율법, 중요하다.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가 없다. 
예수 안에 있으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살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를 해방시키러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정죄하신다. 육신의 욕구보다 성령의 요구를 따라 행하게 하신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한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다면 육신이 아니라 영에 있으시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육신은 죄로 죽고, 영은 의로 산다. 
예수를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부활이다. 
(롬8:1-11)
예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존재가 되길 바라신다. 육신은 그 법을 어기고, 영은 그 법을 이루게 한다.

빚진 자는 그냥 육신대로 살면 죽고,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양자다. 
아빠라 부르며, 그의 상속자가 된다. 
성령은 이 법적 입양의 증인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고난을 받을 것이다. 
(롬8:12-17)
하나님의 양자는 하나님의 법대로, 예수와 함께 불의와 싸우며 사는 자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로 세워질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열정적인 기대 속에 기다린다. 
희망 안에서 피조물이 좌절에 닥치게 된 것은 자의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이다. 
피조물이 종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유와 영광에 이르게 된다. 
피조물이 고통과 탄식 속에 살아왔다. 
추수의 시작, 열매를 수확할 때가 찾아온 것처럼 성령의 열매를 받은 우리는 탄식 속에서 양자가 된 것 곧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되어 갈 것을 열정적인 기대 속에 기다린다. 
우리는 구원을 소망으로 얻었다.
보이지 않는 이 소망을 붙들면 열정적인 기대 속에 기다린다 . 
(롬8:18-25)
출애굽 시대의 노예, 로마와 친 로마 세력 아래서의 노예 그리고 돈과 권력의 노예.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사실에도 난 절대동의 한다. 구원은 모든 자에게 진정한 구원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다.
우리를 위해 연약함을 도우시고, 탄식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신다. 
하나님은 선을 위해 협동하여 일하신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 
이로써 의롭게 하신다. 영화롭게 하신다. 
(롬8:26-30)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주시며 사랑을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시며 사랑을 확증하셨다.
이것은 성령도 증언하는 바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까?
그런데 누가 우리를 고발할까?
그런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까? 
그런데 환경과 순교의 위험이 그 사랑을 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사망과 생명, 하늘과 지옥이 그 사랑을 패배하게 할 수 있을까?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Love Wins!!!
(롬8:31-39)
그 사랑은 우리의 의 때문인가? 아니다.
오직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었는가?
선물로 받은 구원을 까다로운 조건으로 만들어가는 당사자는 예수가 아니라 나다.
Love Wins!!!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언했던 바울이 이스라엘 구하기 위해서라면 끊어질지라도 근심과 고통 가운데서라도 원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구원 자체보다 사랑을 먼저 앞세운 선각자다. 
구원에 메인 구원파들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 하나님이 자손이 아니라 이삭의 후손이 하나님의 자손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 이삭만 약속을 받았다. 에서와 야곱 중에 야곱만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후손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동안 종교적 행위로 자신의 선민사상을 자랑해왔던 유대인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시 되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약속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롬9:1-13)
구원은 구원 자체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적 우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재확인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불의하다? 하나님은 자비로울만한 자에게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은 공감하실만한 자에게 공감하신다. 그 자비와 공감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달리는 사람에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긍휼하게도, 완악하게도 하신다. 
하나님은 허물이 많아 그 뜻에 대적한다? 피조물이 어찌 창조주에게 대적할 수 있는가? 창조주에게는 피조물을 다스릴 주권이 있다. 
진노가 분명한 상황 속에서 오래 참으심도, 영광을 풍성하게 하시려는 긍휼하심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은 유대인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다. 
(롬9:14-24)
이 본문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는 말로 다시 시작되면 즐겁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긍휼로 악을 이기실, 모두의, 사랑의 하나님이다.

백성도 아닌 자들을 아들로 부르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도 하나님이 살아남게 하신 자만 구원 받는다. 소돔과 고모라 같이 행하는 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는 남겨주셨다. 
의는 근본은 예수의 사상, 사랑과 정의가 하나님 나라에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믿음이다.
이방인은 믿고 따름으로 그 의를 얻었다.
이스라엘은 율법적, 종교적 행위만 있을 뿐 실제로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 그의 사랑과 정의를 믿고 따르지 않아 예수라는 바위에 부딪히게 되었다.
예수의 도를 믿고 따르면 그 단단한 바위는 강한 믿음을 갖게 하는 도움이 되고 이런 부끄러움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롬9:25-33)

이스라엘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는 열심만 있고 제대로 알지 못해 복종하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 되어 모든 믿는 자가 의를 행하고 구원을 얻게 하셨다. 
올바른 믿음으로 배운 의는 함부로 천당, 지옥 얘기하지 않는다. 
말씀에 가까워지면 천국과 지옥은 마음에 있음을 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은 아들을 살리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자체가 구원이다. 
믿는 자, 곧 그의 의를 믿고 행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부요케 하실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는 구원을 받는다(롬10:1-13).
로마서는 나누는 말씀이 아니라 모이게 하는 말씀.

하나님의 보내심이 있어서, 전파하는 자가 있고, 듣는 자고 있고, 믿는 자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전할 의무를 불순종한다.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면 믿음이 생긴다.
이스라엘은 다 들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 순종하지 아니한다. 
그렇기에 모세가 말한 대로 이방인을 시기하게 될 것이고
이사야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롬10:14-21)
예수는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복음이 되셨음에도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의 복음을 추구하여 예수에게 외면당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실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고발했다. 
돈과 권력, 바알에게 무릎 꿇고, 배교하고, 선지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은혜로 택함 받은 자들을 남겨두셨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다. 행위로는 벌써 멸망시키셔야 하지만 은혜로 은혜가 되는 구원이다.
이스라엘이 전부라는 착각은 버려라. 택함 받는 자가 구원 받을 것이다.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심령, 눈, 귀가 어두워져 하나님을 모르게 된다. 
다윗도 이스라엘의 심판을 요구했다.
하나님은 정말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실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도 이방인을 풍성케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하신다.
(롬11:1-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세상을 사랑해주길 바라신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란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만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나쁜 올리브나무는 좋은 올리브나무에 젖붙임을 당해야 산다. 
좋은 올리브나무의 뿌리로부터 영양을 받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믿지 않음으로 잘리고, 믿음으로 접붙임 받았다.
이방인들아 교만을 버리고 겸손 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도 자르시는데 이방인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라.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피하라. 
불신앙, 불순종에서 벗어나면 접붙임을 받는다. 
(롬11:13-24)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구원은 어떤 차이도 없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이들은 잘리고, 겸손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순종하는 사람은 다시 붙여주신다.

스스로 지혜 있다 말하는 형제들아
이방인이 충분히 구원받을 때까지 이스라엘은 힘들 것이라는 사실, 이 신비를 몰라서는 안 된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야곱에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회개케 하신다. 하나님이 죄를 없이 하실 때 언약이 이루어진다. 
이방인들은 복음으로 보면 너희가 원수 삼은 자들이고,
택하심으로 보면 너희 조상이 사랑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다. 
불순종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한 것이다. 
너희도, 이방인도 불순종해서 긍휼을 얻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의 깊이를 보라. 
아무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고 상담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을 통해 그의 영광이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다. (롬11:25-36)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책임지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모든 것을 구원하신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그것은 신비요, 언약이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한 사랑이다.

죄악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권면한다.
영적인,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으면서 희생적인 , 제사 같은 예배를 드려라. 마음, 곧 믿음을 새롭게 하라. 몽환적이고 종교적인 헬라와 유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한다. 
너희 생각할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믿음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모두가 다른 기능을 가졌지만 한 몸이다. 서로에게 서로가 도움이 되는 지체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대로 은사가 다르다. 
봉사, 가르침, 위로하는 일는 그 일로, 예언은 믿음대로, 구제는 성실함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면 부지런함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면 열심으로 할 것이다.
(롬12:1-8)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말하는 바를 따라야 한다. 종교적인 헬라와 유대를 넘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형제를 위해 죽어, 형제를 살리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은사는 이것을 하도록 주신 것이라. 최선을 다해 사랑을 이뤄야 한다.

종교를 뛰어 넘는, 죽은 율법 위에 살아있는 믿음, 곧 주의 뜻을 아는 마음이 행하게 될 새로운 질서는 헬라문화와 적극적으로 반대되는 도전이었다. 이제 점점 분명해 지는 믿음의 실체는 그 행함을 촉구함으로 드러난다. 
사랑으로 선에 속하고 악을 미워하라.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하나님을 부지런히 열심히 섬겨라.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필요를 공유하라. 
원수를 축복하라. 저주하지 말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마음을 같이 하라. 
교만해지지 말고, 겸손 하라. (겸손은 헬라보다 유대의 문화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롬11, 종교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뜻을 몰랐던 유대인)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라. 
네가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과 평화를 이루라.
사랑하는 자여,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원수가 배고프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9-21) 
Love Wins. 사랑이 이긴다. 
'율법적', 종교적, 폐쇄적 신앙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 신앙으로 변신을 촉구한다.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 
권세를 거스르는 자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심판을 자취하는 것이다. 
권세자는 네가 악행하면 두려움이 되고, 네가 선행하면 칭찬이 된다. 
권세자는 하나님이 악행자를 보응하도록 세웠다. 
그러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복종하라. 
이것이 세금납부의 이유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다스리는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이 조세, 관세, 존경 등을 원하면 그렇게 하라.(롬13:1-7)
당시 세금으로는 황제의 신전을 관리하는 일에도 쓰였다. 
"이 복종은 진정한 순종이라기보다 무저항, 비폭력적 태도를 의미한다."-IVP 배경주석 하나님은 권세자들을 통해 법질서를 지키게 하셨다. 하지만 권세자가 하나님 나라를 대신할 수 없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헬라인, 로마인, 유대인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진리. 혼돈의 로마서는 여기서 완성된다.)
때가 가까이 왔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 낮이 가까이 왔으니 낮에와 같이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 
(롬13:8-14)
모두가 동의하는 진리. 그것이 복음이었다.

믿음이 연약한 자, 남의 하인. 종교적, 사회적 약자를 심판하지 말라. 주님,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세우시는 사람들이다. 
저들이 안식일을 중히 여기는 것이나 유대의 음식규정을 따르는 일 모두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 사는 것, 이것이 예수가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유다. 
그러니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예수가 말씀하신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는 하나님께 회개하라. 
(롬14:1-12)
유대인도, 이방인도 서로 심판할 수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분은 심판하는 자를 심판하신다.

서로 심판하지 말라. 형제의 길을 막는 일을 하지 말라.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속되지 않은 것이 속될 수 있다. 
음식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고 망하게 하지 말라. 
그렇게 심판하지 않으면 너의 선한 일이 비방 받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들이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실현되는 나라다.
그것을 이 땅에 세우는 일에 힘쓰라. 
음식문제로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하지 말라. 
형제가 속되게 여기는 고기나 포도주 등을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있으라.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다 죄다.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을 행하라. 
(롬14:13-23)
그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로 이끈다. 그 나라에서는 율법이 형제를 죽이는 올무가 아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약점을 믿음이 강한 자가 담당한다.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선과 덕을 쌓아야 한다. 
성경은 교훈, 인내, 위로, 소망을 위한 것이다.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은 예수를 본받아 서로 합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그러기 위해 예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용납하시듯 우리도 서로를 용납해야 한다. 
예수가 할례의 추종자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알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 때문이다. 
이방인들 가운데 찬양과 소망을 하나님께 둘 것이라 많이 예언 되었다. 
소망의 하나님이 기쁨과 평화,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 
(롬15:1-13)
합의하여 영광을 어떻게 돌릴까? 용납하면 가능하다. 서로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며 기쁨과 평화, 믿음, 성령의 열매의 출발점이다.

스스로 선함과 지식을 자랑하느냐? 
도덕적 깨달음을 주고자 은혜로 이 글을 쓴다. 
이 은혜는 이방인을 위해 나를 일하게 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는 은혜다. 
내가 예수 안에서 자랑할 것은 그가 내 삶 가운데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되는 법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신 일들뿐이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지만 전해진 곳에서도 하지 않는다. 
(롬15:14)
이방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 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유대인. 더 큰 착각은 은혜를 모르는 자랑이다. 예수로부터 나온 선함과 지식은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눠져야 할 것들이다.

서바나로 가고 싶다. 
(서바나는 3세기 전, 로마의 통치에 있었으며 스트라보(Strabo) 같은 지리학자들에 의해 '땅 끝'으로 여겨졌다.)
지나는 길에 너희를 보고 사귐으로 기쁨을 가지고 싶다. 
너희가 나를 서바나로 갈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여행경비)
예루살렘에 간다. 
유대 교사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율법 수용의 여부를 묻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연보했다. 
나는 이 이방인의 정품인증을 마치고 서바나로 갈 것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하나님의 사역의 연속을 위해 기도해 달라. 
평화를 행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롬15:22-33)
이방인의 열매가 예루살렘에게로 간다. 단순한 연보가 아니라 평화의 '인'을 들고 간다.

서로 존경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뵈뵈, 브리스가(브리스길라), 유니아, 마리아, 암블리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율리아 등의 "여자들"과 에배네도, 암블리아, 우르바노,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버시, 브렐곤 등의 "노예들"을
보호자, 동역자, 열매, 수고한 자, 친척, 동고동락한 자, 그리스도의 사람, 사랑하는 자, 택하신 자, 어머니 같은 후원자, 형제와 자매 등으로 부르며 문안하도록 한다. 
(롬16:1-16)
여기에 로마서가 말하는 율법의 완성과 평화가 모두 담겨 있는 것 같다.

바울이 로마서 끝까지 경계한 자들은 율법을 오해하게 하는 자들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에도 그들은 율법으로 분쟁을 일으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런 짓들을 했다. 
"순종", 곧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바란다.
평화의 하나님은 우리가 사탄을 이기게 하시는 예수의 은혜를 주신다. 사탄, 악행을 무너뜨릴 때 평화는 찾아온다. 
바울은 큰 교회를 관리했던 가이오와 중요 관직에 있던 에라스도, 형제 구아도도 함께 제자에서 동역자가 된 디모데, 친척과 다름없는 누가 그리고 처음으로 고난 받았던 야손과 소시바더에게 문안한다. 대필했던 더디오도 문안한다. 
비밀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의 글로 말미암아,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의해 모든 이방인이 믿어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 영광! 
(롬16:17-27)
믿음과 율법 순종이 일치되는 순간에 영광이다. 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