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계보는 완전하지 않다. 바벨론에서의 포로역사와 강간당하고 이방인이고 과부이고 남편이 살해당하고 혼전 임신한 여자들과 그런 짓을 저지른 남자들 사이에서 나셨다.(마1:1-17) 그 모두의 왕으로 오셨다. 짓밟힌 인생에 꽃을 피우는 일이 선교다.
예수의 나심은 죄인을 용서하고 함께 삶을 의미한다. 요셉에게 하나님은 마리아의 관습적 죄를 용서하고 함께 살 것을 요구하신다.(마1:18-25) 죄는 용서하지 않고 함께 할 마음도 없다면 전도가 아니다. 주님이 하신대로 해야겠다.
예수의 탄생에 대한 두 반응. 왕인 헤롯은 예수를 찾아 죽이고 싶어 하고, 동박박사는 예수를 찾아 경배하고자 한다. 왕으로 사는 자들은 예수와 그의 도(정의와 사랑)를 권력을 뒤흔드는 적으로 본다. 경배하기 위해 빛으로 탐험하자.(마2:1-12)
예수 탄생의 주적,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폭력적인 정책을 펼친 헤롯왕이 두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예수는 말씀을 성취하며 오셨고, 성취하러 오셨다. 돈, 섹스, 권력이 주인 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 예수는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였다.(마2:13-23)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회개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로, 천국은 이상에서 현실로 옮겨와야 한다. 전에 보았던 돈과 권력의 기득권을 가진 헤롯왕과 종교, 사회의 기득권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와 비교된다. 회개는 삶이다.(마3:1-10)
예수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하겠다던 세례 요한이 세례를 하게 되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 후에 예수의 성령세례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선포된다. 그렇게 첫 예수의 사역은 먼저 높음에서 낮음으로 거함이었다.(마3:11-17)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광야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지극히 높은 산에서 그 능력과 권력의 유혹으로 시험하는 마귀.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행하기 위해 오셨음,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겨야함을 보이셨다.(마4:1-11)
이방 갈릴리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 따랐고 허다한 무리는 소문을 듣고 따랐다. 제자들은 예수가 쫓을 이유였고 허다한 무리는 병 고침이 쫓는 이유였다. (마4:12-25) 제자들의 수보다 바르게 보고 따라야 함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팔복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의 사역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이웃사랑과 천국을 붙여놓고 16절로 결론한다."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16)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 단순히 조항들의 회복이 아니라 관계적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표면적인 범죄 뿐 아니라 범죄 할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것도 죄로 본다.(마5:17-32)
맹세하는 신앙의 한계는 진실보다 맹세를 지켜가려는데 있다.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악인, 원수, 핍박자를 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종교인이 아닌 아버지처럼 골고루 빛을 비추는 일 감당해야한다.(마5:33-48)
구제와 기도는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가짜로 해서는 안 된다. 은밀히 진짜로 해야 한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시작해서 영광으로 끝난다. 그 내용은 용서로 채워져야 한다. (마6:1-15)
나라를 위한 금식도 외식하지 말고 은밀히 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에서 실제로 소재가 넘어온다. 실제의 대표인 재물은 '맘몬', 영적으로 보았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갚을 능력도 없는 이에게 쌓는 보물은 하늘에 쌓이고 의가 된다.(마6:16)
보물은 재물 중에서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 그것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한다.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운 것 같이 빛을 어두우면 어두움이 심해진다. 보물과 재물 사이에 빛 이야기. 돈을 함부로 쓰면 빛을 잃는다.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지 못한다. 돈을 빛을 발하는데 써라.(마6:17-24)
돈이 없을 때 생기는 염려들의 부질없음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을 것을 말씀하신다. 재물신을 섬기는 이방인이나 의가 아니라 돈을 쫓는다. 하나님 나라와 그 정의를 위해 사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신다.(마6:25-34)
구하고 찾으면 하나님 아버지는 주신다. 그러니까 아끼지 말고 남을 대접해라. 남을 대접하는 것이 <금식, 기도, 구제로 외식하고 이웃을 저울질하고 심판하는 자들>종교적 기득권자들에게 율법과 선지자가 된다.(마7:1-12)
좁은 문, 주여주여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 대신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있고, 행하지 않는 자가 모래 위에 있다. 신학적 수준이 아니라 확실한 행동의 열매로써 거짓선지자가 되지 않는다.(마7:13-29)
혐오대상이던 문둥병자를 고치신다. 자신이 하신 것임을 말하지 말라 하시고, 제사장에게 얻으라 하신 증거는 레위기 14장에 사회 속에서 문둥병자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종교에 의해 죄인 된 약자를 먼저 살리셨다. (마8:1-4)
권력을 가진 백부장이 한낱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께 나아간다. 말씀만 해주시면 낫겠다는 것은 자신과 그 하인이 예수의 종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큰 믿음이라고 본다. 백부장이 하인과 함께 종 된 나라, 하나님 나라다.(마8:5-13)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과 온갖 병을 감당하러 오셨다. 그 서기관과 제자는 예수를 쫓는 목적이 누군가의 연약함을 감당하기 위함이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앞가림을 위한 수단이었는가?(마8:14-22) 우리는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와 다른 삶을 추구한다.
예수가 함께 했지만 제자들은 풍랑으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가 함께 했지만 가다라 지역민들은 돼지를 죽였으니 떠나라 한다. 천국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 기적체험자체를 신앙하는 것은 병적 환상에 불과하다.(마8:23-34)
진짜 기적은 예수가 죄인들에게 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에게 가는 것을 꺼려했다. 중풍은 병인데도 종교에 의해 죄가 됐었다. 중풍도 없애고 죄도 없앴다. 무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종교를 긍휼로 덮으신 것이다.(마9:1-13)
금식하지 않는 것,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를 만지는 것, 예수가 죽은 소녀를 만지는 것 모두 불결한 행위였지만 예수는 그 가운데서 사역하셨다. 예수는 새율법, 사랑으로 종교 안에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시켰다.(마9:14-26)
두 시각 장애인과 귀신들려 청각 장애가 있는 자를 예수가 치료했다. 계속해서 치료했다. 바리새인들은 조롱했다. 예수는 계속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했다. 그래서 바빴고 일군들이 필요했다. 예수의 관심사는 괴담이 아니라 사람이다.(마9:27-38)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고치라고 능력을 줬다. 그러나 아무 대가도 받지 말라 했다.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했다. 다만 식사를 대접받으라 했다. 대접은 커녕 겁탈하려 했던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은 심판 대상이라고 위로했다.(마10:1-15)
예수가 받은 만큼 핍박을 받을 것이다. 부모형제가 신고해 채찍을 맞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말라. 몸은 죽여도 영은 죽이지 못 한다.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다. 그러할지라도 정의와 사랑의 율법이 세상을 이김을 선포하라.(마10:16-31)
예수를 시인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말 속에는 그가 살았던 삶의 가치를 시인한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사회적 죽음도 감수해야 한다.(마10:32-39)
여기서 말하는 영접은 쉽게 말해 대접이다. 성경에 나타난 대접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아브라함,롯,라합,마태,삭개오,향유녀..).냉수 한 그릇의 대접에도 상이 있다. 그것이 예수의 가치, 그를 따르는 증거가 될 것이다.(마10:40-42)
세례요한은 예수가 누군지 궁금했다. 예수는 정죄의 사슬을 풀고 장애인과 죽은 자와 가난한 자를 살리셨다. 그동안 천국을 폭력적으로 탈취할 수 있어 보였다. 그들에게 세례요한과 예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한다.(마11:1-15)
자기 율법에 갇힌 자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와 세례요한을 정죄의 굴레에 넣으려 했지만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정한 율법의 무거운 멍에 대신 하나님 율법의 기쁨의 멍에를 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마11:16-30)
예수는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신다. 안식일은 쉼을 위한 것인데 누군가에 의해 정죄의 도구로 쓰인다. 안식일이라는 세칙은 알아도 이웃사랑이라는 헌법을 모른다. 이는 입법자 되신 예수를 모독하며 하나님 나라를 왜곡하는 것이다.(마12:1-8)
사람의 생명이 안식일보다 중요하다. 기적을 쫓는 사람은 예수처럼 될 수 없다. 상한 갈대 꺽지않고 꺼져가는 불씨 끄지 않는 예수를 쫓는 사람은 예수처럼 살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방인도 따르게 한다.(마12:9-21)선한목자가 천국을 이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훼방했다. 예수가 그들이 정죄한 이들에게 치유와 희망을 주는 것을 훼방했다. 성령의 열매 맺는 것,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훼방했다. 이는 용서받지 못할 죄다.(마12:22-37)
바리새인과 서기관,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귀신이 삶의 주인이다. 심판 때에 이방인들에게 정죄를 당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삶의 주인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예수의 가족이다. 회개가 기적보다 중하다.(마12:38-50)
천국은 악한 자들에게 비밀이다. 그들은 천국을 강탈하려 한다. 또한 예수의 뜻을 깨달아 돌이키거나 고침을 받기를 싫어한다. 그러니 씨뿌리는자의 비유가 과연 마음뿐이겠는가? 삶의 주인이 예수가 아니라면 끝내 빼앗길 삶이다.(마13:1-17)
말씀이 뿌리내리고 결실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동정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영혼을 살릴까요? 가라지도 뽑지 말랍니다. 가라지 때문에 밭을 상처 내는 사람들은 멈춰야 합니다. (마13:18-30)
천국은 작은 것에서 시작에서 모두가 쉬고 먹을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귀한 이 시대다. 밭의 가라지는 남을 죄 짓게 하거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에 대한 심판예고다. 구조적 범죄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마13:31-43)
천국은 마치 가치가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가치를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팔기도 하고, 가치 없으면 버리기도 한다. 예수를 가치 없게 보고 다른 가치를 위해 배척했던 나사렛을 보라. 예수의 가치관이 무너진 세상이 지옥이다.(마13:44-58)
세례요한이 왕을 비판한 이유로 투옥되고, 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죄를 죄라고 말한 죄로 죽는다.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들은 늘 적이다. 권력에 진리로 승부하고 장렬히 전사하자. 그리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자.(마14:1-12)
권력에 의해 참사를 당한 세례요한의 소식을 전해 듣고 예수는 권력을 뛰어 넘는 믿음을 훈련시킨다. 그것은 오병이어. 권력이 주는 떡보다 사랑이시고 생명 되신 예수가 주는 떡이 굶주리고 병든 세상을 살린다.(마14:13-21)
세례요한 처형2. 예수가 자신을 위해 물 위에 섰다면 허세다. 그러나 그는 권력이 할 수 없는 일을 보였다. 권력은 선지자의 목은 잘라도 곧 침몰할 것이다. 권력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 믿음이 두려움을 이긴다.(마14:22-36)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계명을 따라 그 입으로 정죄를 내뿜는다. 하나님께 드릴 것은 있고 부모를 봉양할 것은 없다는 자는 외식하는 자, 반드시 죽는다. 손을 씻지 않았더라도 밥을 먹이는 것이 손 씻고도 입으로 남을 더럽히는 것보다 낫다.(마15:1-20)
권력과 유전이 지배하는 시대. 예수는 찾아온 가나안 여인을 개 취급하며 바리새인 코스프레를 하신다. 개 취급당해도 딸의 병을 고치고 싶어 하는 여인. 권력과 유전의 개가 된 세대, 그녀의 딸 사랑과 예수믿음이 큰 믿음이라 칭하셨다.(마15:21-28)
병 고침과 오병이어로 시작하여 병 고침과 칠병이어로 마친다. 예수, 우리 왕은 헤롯과 달리 힘을 비판자를 죽이는데 쓰지 않고 불쌍한 무리를 치료하고 먹이는데 썼다. 권력과 종교의 지배 가운데 그 삶 자체가 기적이고 복음이다.(마15:29-39)
치졸한 세상에서 치유하고 배불리 먹게 했던 예수의 마음은 모르고 표적과 떡만 바라본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정죄하고 버린 자들에 대한 요나의 관심이 표적이다. 자기가 먹을 떡이 아니라 누구가에게 줄 떡을 생각한다면 큰 믿음이다.(마16:1-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개인구원에 대한 담론은 많이 가졌다. 지나친 개인구원의 추구는 인간이 알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인주의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가 가진 공동체의 구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부패시키는 누룩이다.(마16:11-12)
계속해서 치료와 구제를 해오던 예수를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 그는 예수가 생애에 부지런히 펼친 천국의 가치를 알았다. 예수는 그 가치 위에 교회를 세워간다. 그러나 행한 만큼이라는 조건이 달린다.(마16:13-19)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파하지 못하게 한 이유? 세례요한이 바리새인이 세례 받으려 할 때 분노한 사실과 같이 본다. 회개의 삶이 없는 천국이 무슨 천국일까? (마16:19)
예수가 기적의 소문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우상이 되고 개인구원의 소문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값싼 복음이 된다. 천국의 가치가 실현되지 않는 교회는 날개 없는 천사며 능력 없는 경건이다.(마16:13-20)
생명은 자신을 구원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누군가를 위해 죽으면 얻는다. 이것이 천국의 가치며 예수가 실천한 삶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천국의 가치 실현이 죽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그것은 사단의 마음이다.(마16:21-28)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의 삶, 천국의 가치 곧 같이의 가치를 세상에 실천하라. 그러면 이 세상에서 왕 되신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 나만 살자고 남을 죽이는 세상에서 남을 살리자고 내가 죽는 사람이 되는 것, 예수.(마16:21-28)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른다. 해 같이 빛나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수는 두려워 말라면서 손을 내미셨다.(마17:1-8)
메시아의 선지자, 엘리아는 이미 왔다. 그는 세례요한이며 예수는 그와 같이 고난 받고 죽을 것이다. 산에서는 분명 하나님이었던 예수가 인간을 위해 죽겠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십자가 사역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보여주신 것이다.(마17:9-13)
참믿음은 예수를 아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 없이 병 고치는 능력만 바라는 제자는 예수처럼 할 수 없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사랑 없이 흉내만 내면 바리새인 취급받는다. 반면 그분의 사랑을 따르는 믿음으로는 산도 옮길 수 있다.(마17:14-21)
세상 임금과 그 아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의 세금까지 내주셨다. 그는 함께 살고자 노력했다. 특권을 부리며 탈세하는 세상 임금과 비길 수 없다. 같이 사는 사람, 예수다.(마17:22-27)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 천국에서 누가 큰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이다. 천국홀릭에 빠져서 진짜 살고자 한 삶은 모른다. 믿음이 큰 자는 하인과 딸을 위해 자신을 버린 백부장과 가나안여인이다.(마18:1-14)
약자의 편에 서서 약자와 같이 되고, 약자를 대접하는 삶, 그렇게 같이 사는 삶이 천국이 아니던가? 이것이 예수의 삶이 아닌가? 누가 높은들 천국에서 무슨 소용인가? 천국은 이리와 폭군의 것이 아니라 어린 양과 목자의 나라다.(마18:1-14)
어린이에 이어 범죄자가 언급된다. 도움이 필요한 약자로 본 것이다. 그를 위해서도 한명, 두세 사람, 교회가 움직여야 한다. 범죄자이기 전에 교회의 일부이다. 하나가 병들면 모두 아프다. 땅에서 매고 풀면 하늘에서도 매고 푼다.(마18:15-20)
사랑과 용서로 치료하시는 예수의 일상 중, 바리새인은 모세의 이혼율법이 합당한지 묻는다. 그러나 율법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다. 제자들은 차라리 미혼이 낫냐고 묻는다.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천국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하라.(마19:1-12)
사랑과 용서로 치료하시는 예수의 일상 중, 바리새인은 모세의 이혼율법이 합당한지 묻는다. 그러나 율법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다. 제자들은 차라리 미혼이 낫냐고 묻는다.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천국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하라.(마19:1-12)
어린아이들을 제자들은 꾸짖지만 예수는 영접하신다. 부자 청년을 제자들이 저지한 내용은 없지만 예수는 천국 문 앞에서 저지하신다. 영생을 얻기 위해 율법은 지켰다면서 정작 그 율법의 의미대로 이웃사랑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19:13-22)
영생을 얻는 것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동시에 가능할까? 종교행위에는 충성되면서 자기 재산을 사용하지 않아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동류의 기독교 부자들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가? 내 소유보다 내가 대접하는 자를 늘려야 한다.(마19:13-22)
믿음과 사랑은 같이 간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에수의 사랑을, 그 사랑의 율법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사랑을 모른다면 잘 못 믿는 것이다. 영생은 믿음 없이도 없고, 동시에 사랑 없이도 없다. 어린아이는 구분하지 않는다.(마19:13-22)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계명을 다 지켜 행했다.'해도 쌓아놓은 부가 그것이 거짓임을 증거한다. 부는 분배의 불균형. 모든 것을 주 뜻대로 사용하면 모든 것과 영생을 받는다. 종교적 회개는 실제적 회개의 이론에 불과하다.(마19:23-30)
약속대로 일군에게 1데나리온씩 준다. 늦게 오든 일찍 오던. 일찍 온 일군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타박! 그런데 늦게 왔다고 하루 품삯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먹고 살라는 것인가? 이렇게 나중 온 일군이 먼저 온 일군보다 사랑 받는다. (마20:1-16)
세상 집권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여 권세를 부린다. 그러나 천국에서 으뜸이 되려면 종이 돼야 하고, 크고자 한다면 섬겨야할 것이다. 예수는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우리 위해 생명까지 주셨다. 예수의 잔을 들자. 사랑을 위해 삶을!(마20:17-28)
큰 무리 가운데 누가 삶의 주인인지 선포하는 소경과 이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이 둘은 성경의 찰떡궁합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코자 하였고 이를 위해 예수는 사랑하시지만 세상이 버린 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마20:29-34)
겸손의 왕, 예수는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 세상 왕이 그러한 것처럼 힘을 가지고 과시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귀를 선택했다. 역사 속에서 민중과 가장 가까운 왕이다. 군대가 아니라 피와 살로 온 세상을 이기었다.(마21:1-11)
성전에서마저 형제를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대하는 성직자들을 걷어찼다. 수려한 무화과나무라도 한 사람의 배고픔을 달래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하물며 사람이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믿음도 없는 것이다. 차라리 사역 그만 두자.(마21:12-22)
종합병원치유, 오병이어칠병이어무상급식, 장사꾼으로 가득한 성전에서의 난동 그리고 왕으로 추대 받는 예수. 이것을 분하게 느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슨 권세 이러느냐고 따진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의 출처부터 말하라고 따진다.(마21:23-32)
말로 먹고 살던 종교지도자들은 대꾸하지 못하고 예수도 말할 가치를 못 느낀다. 말보다 행함이 있는 회개를 세례요한 때부터 외쳐 왔는데 행하는 예수 보고 권세가 어디서 났냐고? 회개하는 세리와 창기가 말뿐인 종교지도자들보다 낫다. (마21:23-32)
하나님이 주인 되어야할 곳에서 누가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는가? 누가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죽이고 왕이 되려는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아, 네게 주어졌던 기회를 박탈하고 충성된 사람들을 다시 세울 것이다.(마21:33-46)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들만의 성전건축에서 소외된 계층 그러나 열매 맺는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재건하신다. 이것이 너희를 깨고, 흩을 나의 권세니라.(마21:33-46)
천국은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려는데 백성들이 거부하는 것이다. 초청하라고 보낸 종들을 무시하고, 일 따라 돈 따라 가버리고, 심지어 능욕하고 죽인다. 로마왕정시대에 이해가 되는 비유인가? 천국은 그렇게 침노당해왔다.(마22:1-14)
살인자들을 심판하고 길거리에서 선악 구별 없이 초청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복이 문제다. 자신을 위해서는 호화로운 사람들이 임금의 잔치에는 예도 갖추지 않고 참석한다. 임금은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한다.(마22:1-14)
천국잔치에 아무리 불러도 사람들은 돈이 더 좋단다. 사랑과 정의가 실천됨으로 장식되어져야할 천국잔치는 악한 자들의 소굴이 되어간다. 초청은 누구나 받지만 택함 받기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들은 드물다.(마22:1-14)
바리새인은 대제사장들에게 도전적이던 예수는 반사회적일 것으로 보고,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온다. 그러나 예수는 가이사의 세금제도를 따르라 한다. 문제는 로마보다 더 형제를 등쳐먹는 유대골수분자, 외식하는 자들이다.(마22:15-2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저희는 놀란다. 예수는 친사회적이다.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세금납부자가 되다.(동질화) 2)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열매 맺는 삶 강조(마22:15-22)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현존하는 사람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지금은 나의 하나님이신 이유다. 죽은 뒤 걱정보다 지금을 주께 드려야 한다.(마22:23-33)
모세는 젊은 과부로 핍박받는 대신 남편의 형제에게 시집가게 하는 사회적 보호망을 만들었다.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 사두개인들이 묻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돕는 배필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천사들이 서로 돕는 나라다.(마22:23-33)
가장 큰 계명은 복잡 난해한 율법과 교리가 아니다. 단순 명료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없을 텐데도 여전히 복잡 난해하게 가르치려는 시도는 있어도 단순 명료한 실천은 없다.(마22:34-40)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 어떤 기득권도 없다. 그리스도는 순전한 은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교리와 다른 예수에 대해 더 이상 가치를 못 느꼈을 것이다.(마22:41-46)
랍비, 아버지, 지도자로 칭송받기를 거부하라.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있게 하라. 바리새인은 크고자 하는 자요, 제자들은 섬기고 낮추는 자다. 말만 그럴싸하고 약자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되지 말라.(마23:1-12)
겉은 거룩하고 속은 탐욕, 방탕, 외식, 불법으로 가득한 지도자들에게 재앙이 있다. 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지만 정작 선지자적 역할을 하는 이들을 죽이려 한다. 그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같이 "탐욕의 개"이기에.(마23:25-32)
세상 끝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는 때에 시작됩니다. 총체적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면 끝이 옵니다. 말세의 증거는 사랑 없는, 왜곡된 복음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전쟁과 기근 등은 인재입니다.(마24:1-14)
독사새끼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면서 탐욕적인 삶으로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돈과 권력에 찌든 말세에 사랑을 말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자는 구원을 얻습니다.(마24:1-14)
우상숭배가 가져온 물질만능주의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때, 환난의 때가 온다. 그 환난의 때에는 이 세상에 정든 소유를 버리고 여호와의 산으로 도망가라. 소유욕을 잉태하거나 돌보는 일에 빠진 자는 모두 망한다.(마24:15-21)
종말론을 내세워 자신을 믿으라는 자를 믿지 말라. 예수가 오고 가심이 번개 같은 데 저들이 어찌 알까? 다 거짓말이다. 고로 종말이 오게 된 이유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미 죽은 세상에 늘 독수리가 모인다.(마24:21-28)
'그날'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늘에서부터 나타나 보여질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경고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기억하라. 이렇게 다 보여줬으나 열매 하나도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에게 줄 수 없는 자는 심판뿐이다.(마24:29-35)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예비할 수 있다. 대신 깨어 있어야 한다. 노아 홍수도 깨어있는 자만이 피했다. 도둑도 주인이 깨어 있는 집은 못 들어온다. 이미 알게 하셨으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마24:36-44)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사람들을 보살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이다. 그 종은 복이 있다. 악한 종은 주의 것으로 사람들을 때리고, 방탕하게 쓰는 자이다. 이 종은 외식하는 자의 모습으로 그날에 심판 받는다.(마24:45-51)
깨어있으라!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니. 천국은 마치 언제 올지 모를 신랑을 맞이할 등에 기름을 준비하는 자와 준비하지 않는 자 같다. 신랑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자이면 준비하고 그렇지 않으면 준비하는 척만 한다.(마25:1-13)
그렇게 경건의 모양만 있고 실제 능력이 없어서 "공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사는 자들을 예수는 모른다고 하신다. "주여, 주여" 불러도 예수는 모른다고 하신다. 예비되지 않은 삶은 이미 늦은 삶이다.(마25:1-13)
등에 기름과 열매 맺는 삶은 각자가 예비해야 할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빌릴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것이다. 당연히 천국은 미리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자들의 것이지 단순히 순간적으로 선택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마25:8-10)
달란트비유는 하나님의 주신 사랑과 공의로 수고하고 열매 맺는 삶을 그린다. 악한 종은 주인이 수고도 하지 않고 수금하는 자로 본다. 이같이 잘못된 경외심은 종교심과 흡사하며, 사랑과 공의의 실천보다 외식을 부추긴다.(마25:14-30)
앞서 언급된 비유와 같이 예비된 삶과 열매 맺는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되이 일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수식이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형제를 맡아 나누고 먹이는 삶을 통해서 일어날 기적에 대해 믿어야 한다.(마25:14-30)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배고플 때 음식, 목마를 때 음료, 나그네일 때 쉴 곳, 벗었을 때 옷, 병들었을 때 간호, 옥에 갇혔을 때 면회를 하며 "나누는 행동"이 있는 자가 의인이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다.(마25:31-46)
예수의 십자가가 돈에 묻힌다. 향유옥합을 드리는 여인에 대해 돈을 낭비한다고 말하는 제자들, 예수를 은 삼십에 파는 가룟 유다. 이 둘 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랑으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과는 다른 길이다.(마26:1-16)
은 삼십에 예수를 파는 가룟유다, 결혼예물을 예수께 드리는 마리아가 대조된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를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과 예수를 위해 보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마26:1-16)
제자들은 향유의 액수를 아까워했던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려고 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오히려 자신의 성공과 부를 위하여 예수의 가치와 지극히 작은 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마26:1-16)
유월절은 예비한 사람과 함께 하셨다. 그곳에서 예수를 팔 것을 경고하신다. 유다는 그럼에도 발뺌을 한다. 지금도 똑같다. 다들 예수를 안파는 사람처럼 이야기 하고 돈을 계산된 예수를 믿고 있지는 않은가?(마26:17-30)
예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자신을 먹고 마시라고 권하고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주신 것임을 강조. 언약은 그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주시는 것 "십자가" 예수는 그날에 우리와 다시 함께 먹고 마시길 바라신다.(마26:17-30)
제자들은 예수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 다 예수를 버린다는 예언에 절대 버리지 않고, 죽기까지 부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수도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는데, 제자들은 예수의 운명도 자기들이 어떻게 해보려한다.(마:26:31-35)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했지만 예수 자신도 연약한 육체에 자유롭지 못하기에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세 번 기도한다. 제자들은 자기 원대로 하려는 것과 대조된다.(마26:36-44)
사람들은 연약한 자신의 믿음을 너무 의지한다. 의지만으로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의지가 스스로 예수를 대적하게 만들 수 있다. 제자들은 그저 예수가 가신 길을 따라갈 뿐이다.(마26:45-46)
예수는 군대와 검과 몽치로 잡아야 할 만큼 흉악범이었나? 정치범을 대부분 그렇게 잡는다. 강자가 힘을 소유하고 약자 위에 군림하는 세상에서 강자로서 강자를 탓하고 약자를 위해 사신 예수는 늘 정치범이었다.(마26:47-56)
누구나 예수를 위해 입 맞추며 영접할 수는 있다. 그러나 누구나 예수의 정신을 영접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예수를 영접하고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실이다.(마26:47-56)
베드로는 이 땅에 평화로 오신 예수의 방법을 무시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예수는 돈과 힘이 지배한 세상을 사랑으로 바꾸시려 오셨다.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은 서로 해함과 상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로 이어진다.(마26:47-56)
예수가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셨다. 이로써 약자를 겁박하던 십자가, 힘의 지배를 상징하던 십자가는 예수가 그 자체를 상징하게 된다. 강자와 약자의 벽을 허물어 주셨다.(마26:47-56)
예수를 칠 증거로 그가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 고 했다고 하지만 예수는 '성전'을 헐고 '하나님의 성전'을 우리의 마음에 세우신다고 했다. 거룩의 모양이 아니라 실제를 세우신다.(마26:57-68)
예수를 죽일 증거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말했는지 묻자 예수는 재림까지 예언하신다.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사형감이라 한다. 모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고 그렇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마26:57-68)
여럿이 예수의 얼굴에 침 뱉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때리고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맞춰보란다. 저들은 예수도 선지자도 오해하고 있다. 말씀대로 살아도 저들은 사탄처럼 능력을 보이라고 유혹한다. 예수는 능력보다 인내와 사랑을 갚으셨다.(마26:57-68)
사랑과 정의, 이것이 그리스도라고 보이신 예수. 베드로는 이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권력 앞에 이 모든 것을 부인했다. '예수와 함께'함의 의미, '천국'을 모르는 것으로 말하는 삶이 명은 길지만 생명력은 없다.(마26:69-75)
모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회의는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 모였고, 죽이기 위해 빌라도에게 보낸다. 지금도 종교의 우두머리들은 이익을 위해 예수를 죽이고 있다.(마27:1-2)
가룟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무죄한 예수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돌이키기 위해 은 삼십을 돌려준다.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자살한다. 그는 예수의 말대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불쌍한 인생을 살았다.(마27:3-5)
유다가 주고 간 은 삼십은 나그네를 위한 묘지가 되었다. 예수를 판값으로 토기장이에게서 밭을 샀다. 그래서 나그네들이 잠들 곳이 생겼다. 피값으로 산 피밭에 우리의 안식처는 준비되었다고 예언 되어진 것이다.(마27:6-10)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 진술했기 때문이기 보다 유대의 전통대로, 무리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기에 십자가형을 내렸다. 유대의 신앙적 전통이 예수를 죽였다.(마27:11-26)
민란은 당시 메인스피커였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왜곡된 정보로 가능했다. 그들은 흉악범보다 먼저 사형시켜야할 '반역자', '사회악'으로 예수를 지목했다.(마27:11-26)
빌라도와 그의 아내, 그전에는 유다가 예수를 무죄라 하여도 소용없었다. 손을 씻고 책임을 전가시킨다 해도 자살로 삶을 마쳐도 소용없다. 예수는 현재에도 모두를 통해 수난 당하고 계시다. 모두의 죄다.(마27:11-26)
예수의 수난 장면이 너무 세세히 표현되어 있다. 그게 왜 그렇게 수난을 받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그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았다. (마27:27-44)
죄가 없었던 예수, 당시 소시민을 공권력과 종교권력은 무참히 짓밟았다. 힘을 가진 군인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지나가는 사람들과 심지어 강도들마저 그를 희롱했다. 인간애 없는 세상이 예수를 죽였다.(마27:27-44)
그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모두의 왕'으로 오셨다. 자신의 왕권을 되찾는 일보다 먼저 왕권의 순수성을 이 땅에 보이시려고 오셨다. 그것은 율법을 완성시키는 일이고, 사랑으로 돈, 섹스, 권력을 씻는 삶이다.(마27:27-44)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장군이 백성의 안전을 위해 항복한다. 그는 온갖 수모를 당해도 함께 살던 동네 어르신과 어린아이들을 생각한다. 그 장군의 이름은 "예수". 이 세상에 예수와 같은 자들이 많아지길 소원한다.(마27:27-4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는 돌아가시기 전에 한 분만 원망하신다. 이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의 의미는 심판자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마27:45-50)
백부장들과 군사들과 여인네들이 예수가 죽은 후에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는다. 예수가 죽어서 하신 일은 많은 증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를 수 있는 기회를 모두에게 주셨다.(마27:51-56)
십자가가 공의와 사랑의 균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예수는 모든 사회의 악을 짊어지고 가셨다. 그리고 사랑으로 이기셨다. 교회가 모든 사회는 악이라며 적대시하는 것도, 교리를 내세우며 사랑을 미루는 것도 아니다.(마27:45-56)
예수의 시체와 무덤이 주목 받고 있다. 그의 정신은 위대해서 사회지도층은 두려워하고, 사회빈약층은 그리워하는 것이 되었다. 십자가 정신은 이처럼은 죽은 뒤에 더 큰 영광이 있다. (마27:57-66)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를 위해 사용한 세마포는 성전의 휘장의 재료이며, 제사장들과 같은 귀인들의 옷감이었다. 예수 평생에 입어보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가리워진 휘장을 없애고 나서야 그 옷을 입었다.(마27:57-66)
세상에 많은 위인들이 있다. 그리고 시체는 훼손했어도 정신은 건들 수 없던 분들이 많다. 시체와 무덤이 사건의 중심이었던 그 당시, 사실 예수의 정신이 시대를 지배했다. 그 정신이 다가올 시대의 정신이 돼야 한다.(마27:57-66)
현실적이고 비극적이던 십자가 사건이 천사의 등장으로 환상적이고 희극적으로 변한다. 향유의 마리아가 새벽녘에 그 무덤을 찾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이 첫 번째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마28:1-10)
마리아가 무덤에 오고, 천사가 나타나고, 부활을 전하라 명하고, 전하기 위해 마리아는 뛰어가고, 가다가 예수를 만나고, 예수는 갈릴리 보자며 헤어진다. 긴박한 상황전개.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한다.(마28:1-10)
하나는 대적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왜곡할 것임을, 또 하나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행할 중대한 일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지상대명령'이다.(마28:1-10)
천사도 예수도 '무서워 말라'고 권면한다. 신비한 사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순종이 기독교적인 신앙이다. 예수는 사랑으로 싸우고, 사랑으로 이기셨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오신다.(마28:1-10)
종교지도자들과 예수가 비교된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돈과 권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사용하신다. 그 결과는 악과 선으로 드러나게 된다.(마28:11-20)
종교지도자들은 돈으로 군병을 매수하여 부활을 왜곡시킬 것을 명령한다. 또 총독이 알게 될 경우 군병 대신 변호를 할 것임을 약속한다. 지금 세상과 다를 게 없다. 마태복음 속 그 많은 돈에 대한 경계가 떠오른다.(마28:11-20)
반면, 예수의 명령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십자가의 전달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세례는 회개와 함께 한다. 가르치고 지키는 것은 예수가 사신 삶의 추구이다. 예수정신으로 세상과 싸우게 하라.(마2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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