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야생동물는 독립적이고, 굶주린 가축은 의존적이다. 독립적인 존재들을 무서워하는 이들은 그들을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야생동물은 사랑을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가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공동체 안의 사람들과 공동체 밖의 사람들 모두를 존중한다.
성경에 관심 없으면서 은혜를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버리자.
정치에 관심 없으면서 혜택을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버리자.
광고,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광고가 중요한건가?
학문은 무엇이 진실인지 연구하는 것이어야지, 내가 믿는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되면 결국 왜곡이 불가피하다.
한 우물만 파다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너가 교회 밖에서 뭘 할 수 있냐?"
예수의 제자들에게 닥친 최대의 도전...
사랑은 정의를, 정의는 사랑을 도와 진리를 이룬다
디모데전서 6: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경건, 즉 정의와 사랑의 법을 이루는데 나아가지 못합니다. 정욕에 매여 경건보다 사익을 쫓게 됩니다. 결국 악마가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반대해봐. 그의 반응이 그 관계의 미래야.
말하기는 누드 달리기. 나가 뛰는 사람은 부끄럽다. 앉아 구경하는 사람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 언제 발가벗고 뛰는가? 바로 지금,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운 때!
예수도 천국 이전에 회개를 요구하셨는데, 나라는 사람이 사과하지 않는 사람한테 용서할 필요가 있을까? 어줍잖게 용서하면 사실이 왜곡되기 쉽다. 사과 없는 용서, 회개 없는 천국 모두 부패한 것이다.
막12장은 팔복의 실생활 편. 돈에 미친 종교인들과 소외받는 과부가 극단적으로 대조되어 보인다. 특히나 율법학자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키고,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웃과 종교인들을 위해 쓰이는 헌금으로 내놓는다. 사람이 먼저다.
신자들이 성직자에 의존하는 순간, 성직자는 악마의 유혹에 떠밀림 당한다. 신자들이여 영적, 지적 독립 하라. 예수만으로 해방을 완성하라. 더이상 공멸의 길을 걷지 말라.
대한민국 국민들은 투표의 결과가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분명함에도 후보나 정당들의 정책들에 대해 스스로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무지한 상태로 투표에 임합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투표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는 불을 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계시하는 영도 아닙니다. 저는 어려분과 똑같이 성경을 보고, 이해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는 정도의 사람입니다. 저같은 사람을 설교자라고 합니다.
지구 상에 위대한 혁명가들과 예수의 공통점은 반권력적이었고, 단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정신만 남았고, 예수는 부활을 통해 정신과 실제로 나타내셨다. 고로 지구 상의 최고의 혁명가는 예수다. 그를 따르라.
인권 변호사 "조영래", 바보 의사 "장기려",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맨발의 천사 "최춘선".. 예수를 닮은 이들을 대신해 한국의 우상은 여전히 "이건희"인가?
믿음은 예수 자체와 예수가 추구한 삶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종교심은 말씀과 기도를 도구화 시킨다. 도구화된 신앙생활은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다.
목사를 존경할 대상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목사는 종이야. 선교사는 특정 대상 혹은 지역의 종이다. 종이기를 망각할 때 범죄자가 되기 쉽다.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이 전하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따르는 집사를 존경한다.
이렇게 대답하라. 누군가 기독교인이면서 왜 사회와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냐고 묻는다면. "이 상태에서도 침묵하는 것은 범죄 현장을 방관하는 짓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더 비판적이 되어라. 권리포기와 주권회복을 위하여!
아담 스미스의 자본론이 성공하려면 부당이익은 거부하고 노동의 댓가는 요구해야 된다.
남의 피해를 보고서야 내가 이익을 얻는 구조는 투자라고 말하지만 도박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파괴를 몰고 온다.
누군가를 위해 내 시간을 죽이는 일... 그것부터가 고난의 참여였으며 부활의 시작이었다.
성경을 처음 접할 때는 다 내 얘기 같아서 부끄러웠다. 시간이 조금 지나보니 다 남 얘기 같아서 화가 났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지낼만 하다. (성경 앞에 회개도, 정의도 포기한 종교인이 된 순간이 내가 겪은 최악의 영적 죽음)
예수가 하신 일이 베푸신 기적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오신 것이 가장 중요한 기적이다! 이게 헷갈리는거야 아니면 그냥 예수가 아니라 기적을 믿는거야? 또 예수가 다가가신 것은 죄인 뿐만 아니라 약자다! 왜 자꾸 편집해!!!
누군가를 살리지 못하는 고난주간의 고난, 무슨 의미가 있나? 생명을 주기 위한 예수의 고난이 아니라 종교적인 외식으로 치부되는 바리새인의 금식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는 없고 종교만 남은 기독교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예수를 왜 믿는가? 무담보 무이자로 생명을 대출해주신 분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예수가 신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삶에 또다른 생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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