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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요약과 견해

책 정보

김은식 글, 이윤엽 그림, 2006, 봄나무








1947년 1월. 평양의과대학(김일성대학 의대)외과 교수

1951년 6월. 복음병원 개원

1953년 봄.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의대 교수직을 겸함

1956년 6월. 부산대 교수

1959년 2월.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제거 수술 성공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대통령상) 수상

1961년 서울대 교수

1968년 5월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시작. 복음병원 부설 간호학교 개설

1977년. 전 국민 의료보험 시작

1979년 8월. 막사이사이상 수상

 

대한민국 건국 초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

 

p.93 사람이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고, 의사는 하나님을 대신해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의사는 성직이다. 이 한 문장을 붙들고 한 참을 멈췄었다. 



p.130 ‘재시험을 쳐서 고생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틀린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그걸 잘 알도록 도와주는 데 신경을 쓰자’ 하시더군요. 그 뒤로 장 박사님은 학생들 시험지를 채점하면서 틀린 것에도 가위표를 긋지 않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시 정답을 풀어서 적어 주셨어요.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스승이 아니라 다음에 맞출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스승, 참 스승이다. 


p.136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이것이 청십자조합의 슬로건이었다. 조합비는 월 60원으로 결정되었다. 그해 자장면 한 그릇 값이 50원,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15원이었다. 한 달에 자장면 한 그릇 값만 내면 한 가족이 언제든지, 또 절반으로 준 값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셈이다.

공동체운동, 협동조합 형식의 의료보험을 그 옛날에 만들어 낼 수 있었다니!  하지만 그 뒤로 나온 국가 의료보험은 몇 십 보나 후퇴한 의료보험이 등장했다. 


p.139 그렇게 신발 밑창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발로 뛰며 만나고 쌓았던 인간적인 관계가 우리 조합을 이어지게 했다고 봅니다.

관계는 발로 만들어 집니다. 



p.160 장기려는 경계선을 한 발자국 넘어선 채 우뚝 서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p.164 장기려는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를 틀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내의 목소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보고 싶고 그립고, 또 보고 싶은 당신께…….”

누구보다 고통받는 자들의 마음을 잘 알았던 장기려 박사는 특별 우선 순위로 이산가족 상봉을 할 기회를 본래 순서였던 사람들에게 양보합니다. 결국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내를 목소리로만 만났습니다. 


p.192 “내 흉상을 만드는 자는 지옥에나 떨어져라!”


p.194 “내가 하늘나라로 떠나거든,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내 몸은 태워서 부산 앞바다에 뿌려 주기 바란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중략)

그로부터 며칠 되지 않았다. 1995년 12월 24일. 장기려는 만 8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중략)

그날 새벽, 라디오 칼럼을 진행하던 이만열 교수는 ‘방금, 우리는 우리 곁에 있었던 성자를 떠나 보냈다.’는 소식을 전하며 목소리를 떨었다.

 

그는 교계에서 유명하지 않았다. 그가 김일성에 의해 ‘공화국 제 1호 의사’라 칭함 받은 것과 ‘종의 모임’이라는 당시 이단으로 여겨졌던 모임에 가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막사이사이상을 받고 쓴 글이 그의 신앙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인생을 살리기 위하여 모든 고초와 십자가의 형벌까지 받으셨는데 나는 좋은 것을 먹고 입고 마시면서 또 좋은 집에 살면서 일한 것이 아닌가? 희생 없는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생각했떤 것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며 회개한다. 게다가 이 상을 받고 보니 명예심 없이 일한 것이 아니라는 게 증명이 되었다고 생각되어 크게 부끄럽다.”


장기려는 그 뒤로 거의 모든 상을 거부하고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행하는 믿음, 야고보서의 말씀이 실제로 나타난 장기려 박사를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