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2K와 함께 21세기는 혼란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을 악용한 사이비 교주들은 신도들에게 돈과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많은 부류의 사람들은 과거의 리더에 대한 애찬을 계속했다.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큰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난국에는 모두가 영웅을 바라는 것이 대통령 선거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 경제난을 변화시켜주길 바라는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실용을 추구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되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한 명의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헐리우드 영화가 인기가 많다. 모두가 그렇듯 영웅에 대한 기대가 늘 상 우리에 삶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리더십이라는 이야기가 대두되었다. 리더십은 High-performer에게 집중되었고, 교계도 높은 성장률을 보인 윌로우크릭교회 혹은 새들백교회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이 말하는 리더십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뉴에이지적인 ‘죠웰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빅히트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진다. 현재 교계 출판업계는 이상의 그릇된 리더십을 소개한 저자들의 실수를 뒤로하고 좀 더 성경적인 리더십을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섬김의 리더십’ 혹은 ‘영적 리더십’의 컨셉으로 소개된 많은 책자들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리더십을 주제로 했던 이전의 실패작들의 영향에서인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나는 또 한 명의 영적 저자 ‘존 화이트’를 통해서 듣게 될 느헤미야의 영적 리더십에 대해 기대를 하며, 면밀히 듣고 내 의견을 표현하길 원한다.
p.13 따라서, 느헤미야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의 일부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느헤미야라는 인물, 그의 인격과 그의 지도력이다.
저자는 느헤미야서에서 그의 인물, 인격, 지도력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리더십을 이야기 하기를 원하고 있다. 바로 인격이 그가 가지는 리더십의 중심이라는 사실이 증거된다.
p.19 사람들은 어떤 것에 관심이 있을 때 기도한다.
감정과 기도에 대한 그의 설명, 느낌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다시
p.19 성령께서 우리에게 실재(reality)를 보여 주실 때, 즉 사람들이 지닌 필요의 실재들이나 보이지 않는 세력의 실재들을 보여 주실 때, 그것에 관심을 쏟게 된다.
라고 말해, 감정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아니라 실재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시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p.21 믿음은 느낌이 아니다. … 믿음이란 우리의 반응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우리들의 의지가 순종함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 즉 우리가 바라는 것을 그가 할 수 있다는 것과, 또한 그가 그것을 해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전제다. 느낌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실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해야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p.25 느헤미야는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에게 결여되어 있는 공동체적 책임감이 있었다.
이것은 정말 우리가 꼭 들어야할 이야기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개인적이면서 이기적인 기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책임으로 기도했다는 것이다.
p.29 그렇다면 간구의 전제 조건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하겠다. 즉,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마음, 자기 동료에 대한 사랑, 자신의 생명과 운명에 대한 무관심이 그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나라를 위한 기도’는 이러한 것이며, 자칭 선교사들이 기도해야할 것이 이것이다. 저자는 모세, 느헤미야처럼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한다.
p.31 만일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를 당신의 임재 속으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그 분께 나가게 될 것이다.
현재에도 우리는 많은 기도 제목의 홍수 속에 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꼬집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p.39 즉 기도 중에 미리 계획해 둔 점(2:1-10), 사전에 모든 상황에 대해 세심한 조사를 해둔 점(2:11-16), 그리고 일을 맡기기 전에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점(2:17-18) 등이 그것이다.
‘영적 지도력에서 효율성과 조직의 본질과 위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다시 말해, 영적 지도력은 바로 기도와 계획, 조사, 동기부여라고 말하고 있다.
p.45 기도는 바로 계획이 시작되는 곳이다.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제일가는 목표는 큰 능력을 받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발견하는 일이다.
저자는 정말 멋진 사람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으로 리더십을 설명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 모든 효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p.47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문제의 성격을 알고 그 해결책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한국 정치계에는 종교계 인사들이 많이 개입되어져왔다. 특히나 기독교 인사들은 지나치게 보수우파에 속해져서 있었으며, 권력에 관계되어져 왔다. 그들은 너무 많은 세월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과 다르게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존 화이트의 다른 저서 「기도」에서는 “기도는 우리존재 심연에 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맛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p.54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비전을 본 지도자들은, 보지 못한 사람들과 그 비전을 함께 나눈다. 그러나 함께 나눈다는 것은 말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늘 상 우리는 비전과 야망에 대한 혼돈을 겪어왔으며 그에 대한 혼돈을 조장하고 이용한 많은 목회자들에게서 상실감마저 느꼈다. 저자는 모두가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같이 보는 것이 바로 공동체적 비전이다.
p.62 지도자들은 올바른 동기를 가져야 한다. 가장 흔한 실패로는 지도자들이 권세에 집착하려는 것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어 일을 위임하지 못하는 데 있다.
위임과 임파워먼트는 구분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둘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조직 내 상하신뢰성에 대한 문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이 행사하는 중앙집권적 제도의 한계성은 그들의 자녀들로 쓰여진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위임이야 말로 기독교 리더십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이 된다.
p.64 영성은 땀을 대신하지 아니한다. 느헤미야의 조직력과 정신적 압박감 속의 냉철함 그리고 기도는 그가 일하지 않았더라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기도가 산을 옮길는지 모르겠으나 기도와 육체 노동은 서로 훌륭한 동역자들이다. 이것은 계획을 성취시킨다.
저자가 말하는 바는 영성이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영적 리더십은 영성 추구에만 국한되어서 일하지 않는 게으른 리더십이 아니라 그 일에 땀을 흘려 노동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는 영적 행동을 이야기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돕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행동이다.
p.67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2:8, 18) 열심히 일해야 할 때에 열심히 일한 것이지, 항상 무언가 성취하려는 신경증적인 욕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나친 열심에 대한 통찰력 있는 그의 해석은 정말 뛰어났다. 늘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나로서는 다시금 그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 대목이다.
p.70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인식하면서 마음속에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세로 일하였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목표를,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망상에 빠진 많은 크리스천들의 야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일 수 있다.
p.78 그는 죄의식에 민감한 자들에게는 불과 같은 정죄를 퍼부으며 의기 소침한 자들에게는 공포의 화살을 쏘아댄다. 그의 목표는 항상 똑같은 것인데, 곧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그 반대, 즉 계속 일을 추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때로는 완벽주의적 행동 경향 혹은 결벽주의적인 행동 경향을 보이며, 여기서 ‘그’라고 지칭하는 하나님에 반대되는 세력의 꾀임에 지고 만다. 똑바로 못했으니 안 하니만 못하다는 식으로 스스로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발언들을 일삼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계속 순종하며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p.92 느헤미야는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는 행동하기에 앞서 생각한다. 즉 그의 행동은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분노는 어떤 행동으로 표출되는데, 그 행동은 무절제하거나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다.
p.9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공개적으로 표명한 견해와 사적으로 표명한 견해는 서로 일치해야 한다.
크리스천 리더라면 이러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 절제된 행동과 공명정대한 견해. 실리적인 대통령이 되기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우선이다.
p.98 느헤미야는 부패의 여지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는데, 이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그의 척도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예루살렘에 온 연유가 자신의 일념,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p.101 진정한 지도자들은 섬긴다.
섬기는 사람은 바로 목자이다. 양이 아니다. 목자는 결코 양이 바르지 않은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로 자신도 바른 길로 간다. 적당한 부패를 눈감아주는 것이 융통성은 아니며 자율도 아니다.
p.106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실제로 우리에게 정신적 압박감을 덜어 주기보다는 더해 줄지 모른다. 그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압박감에서 압박감으로 이어지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부르심이 또한 능력에서 능력으로 이어지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점이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 그것은 정신적 압박감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도 불러온다. 육체적인 문제는 앞에서 다뤘고, 정신적인 압박감 또한 문제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게 동승했기 때문이다.
p.110 하나님을 따르는 지도자들에게는 공격이 퍼부어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지도자들에게 정신적 압박감을 주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은 다음 두 가지를 잊지 않아야 한다. 즉 반대의 원천(사탄)과 반대의 의도(일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지도자가 조심해야 할 것을 다시금은 영적인 도전과 일의 중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문이 하나 든다. 일을 멈추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인가? 저자의 논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멈추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해가 생기기 말아야 한다.
p.116 우리는 결국 위험이 주는 위협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맡기신 일에 순종하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사역자는 사명자이며, 사명자는 사명을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p.118 진정한 용기라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괴로우며 상심한 때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것을 말함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앤디 스탠리가 쓴 「The NEXT」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리더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용기 없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 따라서 용기는 리더십의 필수 조건이다.” 라고 말했다. 종은 실패할 때 멈추고, 리더는 실패할 때 움직인다.
p.127 고뇌에 찬 감정은 계속하여 의지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도피하거나 대항하여 싸운다. 감정은 위리로 하여금 일정한 행동을 취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아는 것(이해와 양심)은 부담감과 두려움(감정)을 일깨워 주고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의지)하는 것이다.
갱신의 동기가 이러하다면
p.129 갱신은 뭇 남녀들이 자기의 불순종에 대하여 거꾸러져 애통하며 울 때 시작된다. … 진정한 갱신에서 오는 한 가지 결과는 성경 말씀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이해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많은 집회 가운데서의 감동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한 회개 없이 하나님의 음악이 좋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좋다며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그 말씀은 우리의 골수를 찔러 쪼개는 그 말씀이다.
p.140 교회는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맥없고 늙은이같이 되었으며, 우둔하고 나약한 의지박약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징계는 반드시 화해적이고 애정적이어야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징계는 행하여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인내해야 하지만, 그 인내가 묵인의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된다. 모세의 율법에 기준하여, 다시 말하면 말씀에 기준하여 철저히 그 말씀대로 집행해 나갔던 느헤미야의 삶이 우리가 지녀야할 자세인 것이지, 뭇 성도들에게 어울릴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교집단의 리더나 하는 짓이다.
p.142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인기가 있든 없든, 또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든 안 되든 그는 하나님의 우선순위 그대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그렇게 살았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내하며 살다 갔다. 사명자는 이렇게 사명을 다하기 까지 사명을 주신 분께 충성을 다하며 산다.
p.147 그의 기도는 고통으로 찌든 거친 울부짖음이다.
p.149 그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의 가치와 참된 계획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의 모범적인 삶은, 참된 지도자의 길은 지속적인 섬김의 자세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다.
가식적은 종교적 자세에서 벗어나, 진실한 자세를 갖추길 바라고 있다. 기도로 마무리하는 느헤미야의 자세 속에서 그는 그의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냄새가 느껴질 것만 같다. 참된 지도자 상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다를 게 없다. 그런 후에야 디모데후서 4:7의 고백을 다 함께 할 수 있다.
곤란할 때, 화가 날 때 혹은 외부나 내부의 대적들이 등장 했을 때 등의 어려운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느헤미야의 지혜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이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리더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해준 저자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촛불 시위하는 시민들을 빨갱이로 말하는 혐오스럽고 구역질나는 시선들을 거두고 느헤미야처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고, 올바로 보고, 올바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위기 가운데서 영웅을 사용하셨다는 점에 나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영웅은 바로 부지런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받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자였다. 그가 진정한 영웅이었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면서 정의를 지키는 크리스천인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보다 불의는 불의라고 말하고, 정의는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 크리스천을 만들어낼 필요를 다시금 느끼며,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중요한 점을 시사한 느헤미야는 충분히 기독 청년들에게 배움의 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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