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그리고 설교자를 주셨으며, 회중을 주셨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의 설교를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달라졌다. 아니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의 입장이 그러하다. 일방적인 설교 혹은 강의식 설교 혹은 오락적인 설교들이 질서 없이 난무하고 있다. 무엇이 과연 옳은 설교일까 하는 고민과 함께 무차별적 비판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강해적 설교만을 설교의 최우선으로 둘 수도 없는 입장이다. 회중들이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교해야할까? 초보 설교자로서의 내게 던져주는 김덕수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존 파이퍼(John Piper)는 설교의 목표는 “피조물의 기쁜(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죄로 물들어 하나님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이루어진다.> p.5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변혁적 설교의 이유이며, 이를 위해 신설교학파와 개혁주의 신학 사이에서의 올바른 설교 방법이면서, 삶의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 혹은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전통적 설교는 정보 전달적인 특성이 강하고, 그 설교를 알아듣기 위해서 교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인지적 인식 능력이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일방적이고, 높은 강단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리꽂는 권위주의적 명령형이 주종을 이룬다. ‘나는 말하고, 너는 들으면 된다.’는 사고 식으로 설교가 진행된다.>p.16
이같이 전통적인 설교 방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민주적인 방식’이 요구되며, 오직 성서적, 신학적 설교만이 바른 설교라고 하거나 현실 문제를 중심으로만 설교하는 방식, 공리주의적 설교 등을 모두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성경적 설교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 설교를 지배하는 것이며, 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p.19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한 선포를 좋은 설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의 전파는 승리의 선포(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유양겔리온’의 의미이다)이며, 거기에는 모호함이 없다.>p.23
<설교한다는 것은 살아계셔서 구속 활동을 전개하시는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하여 회중과 생동적으로 만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신의 구속 활동을 재현하시는 역동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변화(transform, 변혁)되는 것이 설교이다.>p.23
이렇게 설교에 앞서 그 설교에 대한 정의를 먼저 선행하고 그는 자신이 말하는 변혁적인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먼저 그 내용은
<첫째,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이해, 둘째, 인간에 대한 이해, 셋째, 세상과 문제에 대한 이해이다.>p.30
설교가 성경적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불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설교는 삶과는 무관한 설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회중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는 그 내용상 성경적 가치관이 분명하여 그것에 의해 삶의 경계선을 세워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p.36
다시 말하면, 성경의 가치관을 알게 되면, 삶의 가치관이 성경의 가치관으로 변화하게 되고 이를 통해 삶이 변화된다는 논리이다.
<그럼 성경적 설교가 아닌 영적 담론식의 설교를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영적 담론에서는 설교자가 권위가 되고, 결국 설교자가 영광을 받게 된다. 반면, 성경적 설교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가 되어 말씀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되신다는 점이 전혀 다르다.>p.43
저자는 어디까지나 성경신학적 석의 훈련을 통한 설교 준비가 선행되지 않을 때 생기는 문제점을 경계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급격히 발전한 한국 교회에 나타난 가장 큰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되며, 성경신학적 석의를 전제하지 않은 설교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첫째로 설교의 객관적 유효성의 근거이며, 둘째로 설교자의 주관적 겸손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존 파이퍼는 “설교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면 그 설교는 무효(고전1:17)”라고 강력이 주장하는 것이다.> p.66
십자가야 말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신교가 가져야할 공통된 이유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영해를 하면서까지 억지로 구속사에 연결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올바른 석의 안에서 설명하기를 바라고 있다. 십자가와 성경 가운데 균형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성과 함께 감성까지 터치하는 설교에 대한 주장은
<설교는 본질적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이며, 거기에는 듣는 이의 전인적 요소를 터치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p.73
회중은 감동을 통해서 변화 한다. 좋은 설교는 결국 회중도 감동하게 되어 있다.
<설교자의 역할은 성경의 메시지를 회중의 머릿속에 관념이 아니라 이미지로 새겨지게 그려내고 보여주는 것이며, 신학을 행동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그때 성경의 진리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지고, 그에 의해 행동하게 되고, 삶이 바뀌는 것이다.>p.79
회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적절한 예화는 절대적이다. 그는 그러한 회중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 또한 설교의 주된 목표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회중분석이 성경분석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공동체 속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설교자의 첫째 사명은 설교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회중을 사랑하는 일이다.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설교할 필요가 없다.>p.91
‘설교는 교회에 대한 도전이다.’ 교회와 공동체는 설교를 통해서 변화가 된다. 바른 설교는 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을 세워준다. 한국 교회는 많은 대형 집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의 존재 이유를 묻기 전에 그 집회들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치러지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 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에서 느낄 수 없었던 비전과 도전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설교는 바로 그러한 도전을 주는 설교이다.
그 뒤로 플롯, 구조 등을 이야기 하며 회중을 중심으로 한 설교 구성을 설명하고, 이어서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설교가 되기 위하여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설교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전달하지만, 위대한 설교로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감성적 호소와 열정이 담겨 있다. … 위대한 설교는 감정적 측면과 논리적 측면, 즉 열정과 설득력 혹은 감성과 논리가 화해하고 함께 가는 것을 볼 수 있다.>p.151
논리에 감정을 첨가한 이 위대한 설교에 대한 과정에서 중요한 한 대목을 ‘설득’으로 잡는다.
<설교자로서,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의 설득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의 기회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p.154
하지만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정서적인 설득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함으로써 현시대의 문제는 그 기대함의 부재가 아니라 바로 정서적 설득의 부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설명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회심 순간에 대속적 죽음의 완벽한 교리적 이해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주셨다는 감격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 이처럼 논리와 교리보다 감성이 최후의 변화를 야기한다.>p.159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이해에 따른 반성이 아니라 감성의 변화를 통한 예수님 영접? 지․정․의의 전적인 회개를 통한 예수님 영접이 아니고, 감성에 의한 예수님 영접을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이것은 정서적 설득을 강조하기 위한 설명에 불과하다.
<신약에서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예수님이 하신 탕자의 비유가 설교 중 예화인가? 아니다. 그 비유가 곧 설교였다는 것이다.>p.165
예화를 설교만큼이나 강조하는 대목이다. 예화, 유대인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설교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화 선택의 중요성과 예화 활용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예화집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주장하였다.
결론에 앞서 삶의 변화의 결정을 회중에게 전적으로 맡기거나 설교자가 결정하거나 하는 문제를 저자는
<지도자로서 설교자는 공동체에게 하나님을 대언해 무엇이 진리인지 분명히 제시하고, 선택을 촉구해야 한다. “네 앞에 축복과 저주가 놓였으니 선택하라”는 것이 구약(신11:26-29)과 신약(요3:16-18의 구조를 분석해 보고 막6:11을 참조하라)에 일관성 있게 흐르는 복음 선포의 정신이다. 그것은 또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방식(행13:44-52; 롬 2:4-10, 6:23)이기도 하다.>p.181
선택에 대한 촉구. 그것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촉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서 절충적인 대안이라고 생각도 되지만, 현실적인 설교 앞에서의 회중의 압박감은 칼빈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어진다.
계속에서 제목 짓는 법과 표현력을 강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회중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의 고민과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설교는 읽는 것이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성경 역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회당이나 회중 앞에서 낭독되는 것으로 여겨져 유대인들은 성경을 ‘미크라’라고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p.215
설교자는 발음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또한 모든 설교문은 구어체로 쓰여 커뮤니케이션에 문제를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설교자는 학자적 혹은 강의안 작성자의 입장에서만 써나가지 말아야 하며 회중이 다 자신처럼 말씀에 대한 관심이 높아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p.221
저자는 늘 회중에 관심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래야한다고 한다. 석의를 기반으로 하되 표현법에 대해 회중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부족함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사상과 논리보다는 묘사적 이미지 언어를 통해 성경의 진리가 현실 속에 드러나게 하자.>
분명한 저자의 주장. 그리고 많은 시를 인용합니다. 감성적이고 창조적인 말하기가 되어 설교는 회중 가까이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는데 는 관심이 있었지만, 회중의 수준에는 관심이 없었던 설교자에게 저자는 문학 소년의 수준까지 요구하며 대단한 압박감을 준다. 하지만 분명, 현대의 회중들에 대한 고민들 속에서 나온 이야기임에 공감한다.
목소리, 어조, 표정, 몸짓, 시선교환, 스피치 훈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열정까지.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이 이토록 많습니다. 결혼식장 앞에서 웃는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도 그토록 고민을 하고 최선을 다했으면서, 설교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회중 앞에서의 자세가 바로 경건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한 설교는 그 메시지에 대한 내가 불타고 있고,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심장이 고동칠 때만 가능하다. 거짓된 설교는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설교에는 우리의 영혼이 묻어나기 때문이다.>p.266
하나님은 앞에서 설교는 대화라고 전제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회중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은 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어 존 파이퍼가 설교 전의 자세를 설명한다. 고백한다. 기도한다. 신뢰함으로. 당당하게 설교한다. 감사한다. 이 5가지 단계를 통해 설교자로서의 인격을 정비하며 하나님과 회중 앞에 나갈 수 있다.
<가장 진실한 복음은 교의적이기보다는 인격적인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였다. 그분은 내가 진리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하지 않고, ‘내가 진리다’고 외쳤다(요14:6). 이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설교자가 외칠 진리가 어떻게 인격을 통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는지 알 수 있다.>p.271
모든 것은 석의를 전제하는 그의 주장이다. 석의만 잘하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잘난 설교가 아니라 잘하는 설교, 인격적인 설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좋은 설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뛰어나다. 첫째로 설교의 메시지 자체가 좋고, 둘째로 전달 방식이 훌륭하다.>p.281
<이처럼, 좋은 설교는 그 설교를 들은 회중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가 아닌가로 판단되어야 한다. 회중의 삶의 변화란 첫째는 개인적인 삶의 변화로, 둘째는 공동체의 형성으로 증명된다.>p.283
좋은 메시지와 그 전달방식은 회중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 변화는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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