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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워드 요더 <예수의 정치학> 요약 및 견해

 민주화 역사를 되돌린 이명박 정부 앞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 누구도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에 대해 깨닫게 되고, 더욱이 크리스천의 정치에 대한 자세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울 것이 많은 책이다. 나는 이 책 속에서 나타난 예수의 정치적 태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길 원한다. 그전에 앞서 먼저 저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존 하워드 요더는 ‘성경적 현실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이 책 또한 그러한 움직임을 윤리의 영역에 적용해 보려는 뒤늦은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성경적 현실주의자들은 우리가 속한 보수교단과는 예수에 대한 정치적 이해에 차이를 보인다. 먼저 보수 교단은 예수 자체가 비정치적이며 비폭력적인 분이라고 보는 반면, 성경적 현실주의자들은 예수는 비폭력적인 정치적인 활동을 했다고 본다. 이것은 정치적인 자세에서도 차이를 보이게 된다. 보수교단은 비폭력적인 예수를 정치적으로 본다면 실패자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현실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적 정치활동은 정치적으로 반향을 일으켰으며, 사회변화에도 공헌했다고 본다. 요더는 또한 재세례파라고 불린다. 재세례파는 성인세례만을 진정한 세례로 보는 입장으로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의 견해를 따르며, 그리스도교도들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로운 전쟁을 행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시민 선서를 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런 신앙 때문에 수천 명의 재세례파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재세례파의 사회참여에 있어서 존 하워드 요더는 수장에 가까운 인물이며, 후에 『하나님의 정치』를 쓰는 짐 월리스가 바로 그의 수제자이다.


  서문에서도 밝힌바, 이 책의 논지는 주석의 영역이 아니라 윤리학 방법론의 영역이며, 예수의 정치적 성격이라는 주제를 담론화 하려는 것이 책의 핵심적인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이유도 예수는 정말 정치적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먼저, 예수가 정치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바로 정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전적인 입장에서는 이를 부인하며,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p.27 예수는 폭력, 자기 방어 및 안전을 위한 재물 축적 등은 거부하고 왕국의 예언자로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입장을 견지하는데, 이는 사회적 가치들에 대한 항구적이며 일반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런 태도는 이런 사회적 가치들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전제 아래만 의미를 갖는다.

바로 예수가 사회적인 구원자의 역할보다,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예언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p.33 예수의 가르침을 단순한 윤리적 교리문답 형태로 정리하고 해석하려 했던 마태 역시 예수를 오해한 것이다.

라고 말하며, 예수의 가르침이 단순히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 혹은 윤리적 문제도 언급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며 ‘예수의 인간적 삶이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의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예수는 권력과 야합하지 않은 정치적 행동을 보였다는 전제 아래서

p.42 신약을 해방 운동에 대한 증거라는 독특한 성격의 글로 읽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해 ‘해방신학’의 편법적 요소들만 보지 말고, 성경 읽기의 다양성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p.47 예수가 온 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내놓은 대부분의 지침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가 맡은 것은 구원자의 역할이었고, 우리가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그가 제시한 이상대로 살고 있지 않음을 전제한다.

예수의 사역의 성격을 재조명하는 부분이다. 바로 예수의 초림을 성육신으로 본다면, 그의 초림도 우리에게 영육간의 회복을 불러일으키는 오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의 영혼만을 위해 오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정결함을 위해서 오셨던 것이다.

p.53 그의 임무는 사람들이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위로’였는데, 이 열망은 제의적인 것도, 교리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는 좁은 의미에서 ‘종교적’ 열망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자기 백성의 억압을 풀어주기 위해 오는 자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함을 표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에는 더러운 육체의 거룩한 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종 된 삶의 해방이 먼저였던 것이다. 보수교단의 가르침에서는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인으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의 역사를 보여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죄와 율법에 종 되었던 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얽매였던 것을 풀고, 예수의 새율법을 쫓아 살아갈 것을 선포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p.57 헤롯이 본처를 버리고 대신 헤로디아를 택한 것은, 왕국의 아레타스 4세와 전쟁을 치르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벌써 하나의 정치적 행위였다.

요한의 투옥을 단순히 도덕적 이유로 볼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 따라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것을 봐야 한다는 해석이다. 세례 요한도 결국 정치적 죽음을 당했으며, 예수도 정치적인 저항세력으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더욱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활동의 진위여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p.59 시험하는 자가 예수를 현혹하기 위해 내놓은 선택 조항들은 모두 어떤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물음과 관계된 것들이다.

이렇게 예수의 정치적 성격을 드러낸 저자는 안식년과 희년으로 그 주제를 옮긴다. 사회 윤리적 접근이 구약에서도 증명되지 않는 다면, 저자의 논리는 성격의 곡해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예레미야 34장을 언급하면 반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앤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즉 인도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드기야 왕의 노예 해방 선포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한 대가에 대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듣는 것은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 율법의 가치에 대해 하나님은 분명히 묻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p.80 세상 왕들의 통치 방식을 벗어나는 이 대안은 ‘영성’이 아니라 종노릇이다.

영성 충만을 목적으로 살아왔던 몇몇 성도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영성을 빌미로 범죄가 늘어나는 한국 보수교단에 이 충격적인 문장은 회심의 개기가 되어야 한다.

p.99 십자가는 도래한 왕국 자체인 것이다.

십자가가 진정 이 땅에 평화를 안겨준 증거이며, 우리가 나눠지고 가야할 그 십자가라는 전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 아래 통치되는 나라 속에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회복되는 그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p.101 그는 근본부터가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닌 새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위협한 사람이었고, 그가 진 십자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윤리로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나 역시 부인할 수 없으며, 윤리와 담을 쌓은 듯 한 보수 교단의 범죄적 행태에도 이 십자가는 빛을 비추고 있다고 확신한다.

p.121 이 땅에서 희년을 실천하기 거부하는 자들에게 신적인 희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p.128 주후 26년 예수가 선포한 것은 모세의 안식일 규정을 따른 희년이었다. 빚을 탕감하고, 빚을 갚지 못해 종으로 전락한 빚진 자들을 해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희년인 것이다. 이러한 희년의 실천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천국을 위한 선결 과정에 속한 것이었다. 이 길에 들어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희년 앞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은 다르며, 우리가 할 일은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이라는 이원록적 주입식 교육에 세뇌되어, 더 이상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을 추구하지 못하게 되었고, 도리어 반쪽짜리 천국을 향한 열정으로 선교하고 있는지 모른다.

p.148 전쟁은 야훼를 신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스라엘 특히 왕이 가진 불신앙적 태도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전쟁에 대한 태도에 대해 위와 같이 해석하며, 비폭력 저항인 파업을 선택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도 더하여 비폭력적 저항 세력이었던 민족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전한다.

  자, 여기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 있다. 도전을 받으면 좋겠다.

p.175 신자의 십자가는 그들이 견뎌내도록 요구받는 모든 종류의 고통, 질병 혹은 갈등과는 다르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신자들의 십자가 역시 사회적 영합의 거부에 대한 대가다. 그것은 병이나 재난처럼, 설명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그 대가를 미리 계산한 뒤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의 종착지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내게 십자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은혜’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제 내게 십자가가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나는 ‘내리사랑’이라고 또박또박 말해줄 것이다. 십자가 앞에 백인들은 늘 잘 살고, 흑인들은 늘 굶주려 죽어가야 하는 현실 앞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p.250 우리의 종이 되어야 할 구조들이 우리의 주인이자 보호자가 되었다. … 타락에도 불구하고 권세들은 질서 유지 기능을 계속 수행한다. 전제적 통치조차도 혼란보다는 나으며,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복종해야만 한다.

권세 앞에 힘없는 한국 교회. 저자의 정리된 그 그늘 진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 또한, 무엇보다 촛불 시위와 경찰의 폭력 진압이 떠오른다. 촛불 시위는 가능한 시민 저항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순순히 잡혀갈 의무도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아이러니이며, 이미 구약 때부터 있었던 사회질서와 하나님 나라 질서의 충돌이며, 가이사와 하나님의 것에 대한 중첩되는 그 부분이다.

p.260 정의와 자비가 우리 자신의 공동체 속에 편만하고, 사회적 차별이 우리를 갈라놓는 파괴력을 잃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의 불의와 공동체 해체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공의와 사랑의 균형이 되는 표증을 가졌음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수룩한 순종의식 때문인가? 아니면 무비판적 사고의 옹호론자이기 때문인가? 답답하다.

p.269 제자들이 어떤 종류의 힘을 행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 이러한 거부를 통해 그 권세가 압제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편을 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그 약자에 편에 선 사랑의 증거. 우리는 그 증거 앞에서도 교리를 따라 사람을 죽이는 칼뱅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일까? 마치 우리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말씀 앞에 우리는 모두 부끄러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p.307 다시 한 번, 복종에 대한 요구가 상호적이라는 사실은 혁명적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정부의 정책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상호적 성격의 특징이다. 하지만 정부 아래서 모든 사람은 그 법아래 있으며, 구속 혹은 사형당할 수 있는 여지 속에서 저항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 속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현실이 보장하는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p.342 신약이 요구하는 복종은 존재하는 어떤 권세라도 그것을 인정하며 어떤 구조의 주권이 지배하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본문은, 전통적인 견해가 주장하듯, 어떤 특정한 정부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거나 인정된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흔히들 이명박 정부가 하나님이 세우신 정부라고 말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인간이 세운 정부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다만 그 권세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볼 때, 우리는 그 권세에 복종할 필요도 있다. 그렇다고 그 권세의 부림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되지도 못한다.

p.344 불의한 정부에 저항하여 궐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시민의 의무다. 정부라는 제도 자체에 저항하기 때문이 아니라 합당한 정부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p. 345 그 정부가 로마서에 그려진 것과 같은 질서 있는 정부라면 지지하고,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것과 같은 악한 정부라면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크리스천의 정치참여라고 생각되어진다. 민주주의 시민이면서 민주주의 권리와 의무는 거부하는 크리스천은 대체 어느 성경을 믿는 사람들인가?

p.378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칭의’란 바로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화평을 이루는 것’ 혹은 ‘막힌 담을 허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의로움에 대한 입장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얻어지는 바로 칭의가 다름 아닌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뤘음에도 이웃과 화평하기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이익집단인 교회를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p.383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는 말은 하나의 사회적 혹은 역사적 진술이지, 내향적 혹은 감정적 진술이 아니다.

우리는 혹시 아직도 성령충만을 감정적 느낌의 충만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성령충만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 교회 생활 속에서 의문이 들어야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충만으로 인해 변화하는 교회를 봐야한다.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긍정적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를 봐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p.400 의로운 자들의 승리는 부활의 능력 때문이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계산 때문도 아니며 선한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더 큰 힘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과 하나님의 목적의 승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다.

기복적인 신앙관에서 이해될 수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바는 결과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이다.

p.401 우리는 그를 역사를 움직이는 자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역사의 움직임을 바라보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p.402 왕관을 거부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그가 내린 결정은, 기꺼이 ‘효율성’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의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신적 사랑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었다.

p.406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의 이런 부름이 가리키는 바는 바로 전략이라 할 수도 없는 이 순종이라는 전략의 외관상 패배이며, 또한 오로지 자신을 이웃의 자비로운 처사에 맡기는 사랑, 곧 대적과 소외된 자들과의 화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정의를 포기하는 그런 사랑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이 겪어야 할 불가피한 고통이다.

  기독교 평화주의의 당위성을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다. 나는 거꾸로 질문하고 싶다. 기독교는 평화주의가 아닌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와 전쟁을 선포했을 때, 미국의 보수 교계는 이에 찬성을 표했다. 진보 교계는 물론 반대했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라크의 수많은 민간인들의 주검 앞에서도 당당히 거룩한 전쟁, 성전을 선포할 수 있는 그들의 의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이 허락한 전쟁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주먹이 센 놈이 이기는 세상의 질서대로 세상을 보면서, 어찌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명박 정부의 문제점은 소통이며, 그 누구도 이명박 정부에게 다수의 의견을 전해주지 않는다. 우파의 생각만을 전해주며,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의견이 다수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의 개인적 도덕적 해이를 떠나 기독교 공동체들마저도 그것을 묵인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드는 것보다 지금은 강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도 없는 주장들이 난무한 이 세상이 말세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지난주일 나는 장로교 통합측 교단의 한 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11절을 인용하며, 모세에게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했고, 목사에게 불순종한 성도들도 멸망이라고 주장했다. 그 설교도 아닌 주장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십자가는 구원이라고 말하지만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세상이다. 부랑자가 옆에서 죽어가도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손을 거둘만한 교육의 피해자가 바로 현재의 기독교인들이다. 함부로 성경을 말하지도 말아야할 것이며, 정직하게 전할 수 있다면, 분명 요더의 생각대로 정의와 진리가 양분되지 않고, 함께 실천되어지는 나라를 위한 삶,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 속에서 평화 가운데 살 수 있게 될 소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