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들어가는 말
현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일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즉 여기에는 그분이 우리의 본성이나 상태에 새겨 넣으신 유사성과는 구별되는, 우리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p.21
"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라는, 어느 현대 작가(드니 드 루즈몽M.Denis de Rougemont)의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사랑은 신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시작한다"라고 고쳐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균형이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균형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는 진리가 어느새 그 정반대 의미인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2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무조건적 헌신을 인간적 사랑에 바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며, 그 자신 또한 파멸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자리를 허용받은 인간적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사랑으로 불릴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복잡한 형태의 증오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p. 24
우리에게 있는 필요의 사랑은 탐욕스럽고 완고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를 신으로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그런 시도를 할 만큼 그렇게 하나님과(유사성 측면에서) 가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25
2장 인간 이하 것에 대한 애호와 사랑
p38. 필요의 사랑은 우리의 빈곤에 대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선물의 사랑은 하나님을 섬기려 하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도 감수하려 합니다. 그런데 감상의 사랑Appreciative love은 하나님께 "당신의 크신 영광에 대해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합니다. 필요의 사랑은 어떤 여자에 대해 "그녀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합니다. 선물의 사랑은 그녀에게 행복과 위로와 보호를-가능하다면 부富도-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감상의 사랑은 가만 숨죽여 그녀를 응시하며 그런 찬탄할 만한 여인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합니다. 설령 그녀를 얻지 못한다 해도 완전히 낙담하지 않으며, 그녀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보다는 더 나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3장 애정
p.64 그리스인들은 이 사랑을 스토르게storge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는 그저 애정Affection이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헬라어 사전에는 스토르게를 '애정, 특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애정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분명 이런 애정이 그 단어의 중심 의미일 뿐 아니라 원형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이미지는, 아기를 보살피는 어머니 모습입니다.
p.80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애정의 특성은 무시무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애정의 또 다른 특징인 편안함과 격의 없음도 마찬가지입니다.
p.82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소." 이 말의 배후에는, 최선의 애정은 하고 싶은 말이라면 비록 공적인 예의규범에 어긋난다 해도 무엇이든 다 해도 된다는 왜곡된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선의 애정은 결ㄹ코 상대에게 상처나 모욕감, 굴육감을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무심코 당신의 칵테일까지 마셔 버렸을 때, 그녀를 "돼지!"라고 놀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같은 이야기를 또 반복하려고 하면, 당신은 펄쩍펄쩍 뛰며 말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짖궂은 희롱이나 장난이나 농담을 할 수 있습니다. "입 다물어! 책 좀 읽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어조로(상처를 줄 의도나 가능성이 없는 말투와 시점이라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애정이 더 깊어질수록, 그런 어조와 시점을 정확하게 이해합니다(모든 사랑에는 나름의 사랑의 기술이 있는 법입니다).
p.86 이 질투심은 아마 조롱으로 포현될 것입니다. ~ 중략 ~ 왜냐하면 사랑 중에서도 애정은 가장 본능적인 사랑, 그런 의미에서 가장 동물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정의 질투심은 그만큼 격렬합니다. 그것은 음식을 빼앗긴 한 마리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냅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언가 혹은 누군가 때문에 지금 가히 평생의 양식, 제2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을 빼앗겨 버린 상태인데요. 그의 세계 전체가 황폐해진 것입니다.
p.92 이처럼 선물의 사랑에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사랑은 포기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들에겐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라고 말하게 되는 시간을 보답으로 여겨야 합니다.
p.99 애정이 시들해질 때는 다시 자극해 주고, 애정이 사랑의 기술을 망각하거나 무시하려 할 때는 다시 자극해 주고, 애정이 사랑의 기술을 망각하거나 무시하려 할 때는 제어해 줄 정의justice가 필요합니다. 또 '선량한' 태도도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애정은 애정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사랑으로부터 지속적인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려는 요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애정으로만 살려고 하면, 우리의 애정은 그만 '썩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p.101 즉, 그 사랑 안에 증오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애정이 삶의 절대 주권자가 되면, 그 씨앗은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4장 우정
p.109 고독이 그러하듯, 우정 역시 사람들을 집단의 '연대감'으로부터 이탈시킵니다. 그러나 우정이 고독보다 더 위험한 이유는, 우정은 사람들을 두세 명씩 묶어서 이탈시키기 때문입니다.
p.112 이렇게 참된 우정은 사랑 중에서 가장 질투가 적은 사랑입니다. 두 친구는 친구가 늘어나 셋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셋은 넷이 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물론 그 새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p.136 마지막으로 주목해야할 점은,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우정을 이미지로 사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높은 사랑의 상징으로서, 가히 천사들 사이의 관계처럼 보이는 이 우정은 제쳐 두고 훨씬 더 자주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사랑 속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애정은 하나님이 아버지로 표현될 때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 에로스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신랑으로 표현될 때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
p.153 우정은 서로를 알아본 우리 자신의 뛰어난 분별력이나 안목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우정은 우리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5장 에로스
p.163 에로스 없는 성적 욕망은 그것 자체를 원하지만 에로스는 그 연인 자신을 원합니다.
p.165 이렇게 에로스는 성적 쾌락 같은 최상급의 필요의 즐거움을 최고의 감상의 즐거움으로 변모시켜 주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p.166 에로스 없이 느끼는 성적 욕망은, 다른 모든 욕망이 그렇듯 우리 자신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에로스 안에서 성적 욕망은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에 관한 일입니다.
p.167 하나님을 향한 중단 없는 섬김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결혼생활 자체이지 부부의 침실이 아닙니다.
p.180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에 하듯 하는 한에서 그렇습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에베소서 5장 25절).
p.181 그리스도와 같은 머리 됨(이와 다른 머리 됨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을 행사하는 남편은 결코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p.183 상대를 놀리며 웃는 것이 반드시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연인은 함께 아기를 보며 웃기 전까지는, 항상 서로를 놀리며 웃습니다.
p.184 위험의 씨앗이 숨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에로스의 그 숭고성입니다. 에로스는 마치 신처럼 말합니다. 완전히 헌신하고, 행복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기심을 초월하는 것이 마치 영원한 세계로부터 오는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p.187 에로스의 전적인 헌신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에게 행해야 하는 사랑의 패러다임 내지 본보기-우리 본성 속에 주어진-가 될 수 있습니다.
6장 자비
p.205 사랑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 유일한 연인이신 하나님께만 우리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p.208 천국을 제외하고, 여러분이 사랑의 모든 위험과 동요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지옥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랑에 내재해 있는 고통을 피하려고 애씀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p.209 그러나 하나님과 지상의 연인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의 기독교적 의무에 관한 한 두 감정 사이의 강도를 비교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선택의 상황이 올 때) 우리가 어느쪽을 섬기고 선택하고 우선시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어느 쪽 요구에 우리의 의지를 굴복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분은 상처 입을지 모르니 지상의 사랑을 경계하라는 식의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것을 막는 순간에는 가차없이 모두 밟아 뭉개라는, 가혹한 채찍과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 14장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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