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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숨겨진 메시지>라고 쓰고 '예수님의 진짜 메시지'라고 읽는다.

<예수님의 숨겨진 메시지>라고 쓰고 '예수님의 진짜 메시지'라고 읽는다.

저자 소개 

 브라이언 맥클라렌
『Time』지가 선정한 "영향력있는 복음주의자 25인" 중의 한사람. 미국 이머징 교회운동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강연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미국 복음주의의 차세대를 이끌 젊은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Time』지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다양한 신학적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은 바 있다.
(중략)
"나그네 선교회" 실행이사이기도 한 저자는 『저 건너편의 교회』(낮은울타리), 『믿음찾기』(미션월드라이브러리), 『나는 준비된 전도자』(미션월드라이브러리), 『세상을 정복하는 기독교 문화』(이레서원, 공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IVP) 등 현대 기독교를 논한 10여권의 책을 저술하여 그 탁월함을 인정받은 바 있다.

저자 홈페이지: www.brianmclaren.net


문제제기


P.23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것과 다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셨지만 우리가 그 핵심을 간과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입으로는 예수님을 공경하고 높이 떠받들었지만 정작 그분의 핵심 진리와는 거리가 먼 종교를 구축했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실제로 그분처럼 살게끔 신자들을 훈련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캠퍼스선교단체에서 활동했던 나에게 이 질문은 이미 사역을 시작한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생겨났다.  분명 '지상대명령'이라는 구호 아래 전도지를 활용한 전도만을 강조해온 나는 졸업생들이 이후에 예수님과는 전혀 다르게 사는 모습에 나의 훈련 방식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과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잘 해줄지에 대한 의문과 기대로 읽기를 시작했다.

영향을 준 사람들
p.307 그들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에 관한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달라스 윌라드, 라이트 주교(N. T. Wright), 윌터 윙크,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윌터 브루그먼이 쓴 책들이 나의 사고를 자극했다. 물론 그 밖에도 샤론 웰치(Sharon Welch),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 브라이언 해서웨이(Bryan Hathaway), 짐 월리스, 존 퍼킨스(John Perkins), 토니 캠폴로, 토드 헌터(Todd Hunter)를 비롯해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일단 그가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반갑다. 그는 분명 내게는 낯설지 않고, 내 주변 사람에게 낯선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완료시제

p.38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다.

p.255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는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고 대답하셨다.

p.284 우주 만물과 개인의 종말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사변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현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 추수를 바라보면서 지금, 이 세상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주님의 사역에 헌신하고 주 안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천국의 알곡은 단 하나라도 낭비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수고는 단 하나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p.299 하지만 이것이 요한계시록 11:15의 정확한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장의 시제가 미래시제가 아닌 현재완료시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라다(또는 나라가 되었다)"라는 뜻이다.

복음은 실제의 삶에 영향을 주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복음은 현재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가? 그렇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지금 현재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계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이루어 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


정치

p.43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열심당처럼 칼로 로마인을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 군인이 오른쪽 뺨을 가격하면 왼쪽 뺨마저 내주는 비폭력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로마 군인이 짐을 들고 5리를 가라고 하면 10리를 가주는 관대함을 베풀어야 한다. 즉 소극적인 복종이나 적극적인 보복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p.43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은 헤롯당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순응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맹목적인 애국심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불의에 맞서 싸우며 현상 유지에 안주하지 않고 기존의 잘못된 관행과 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비폭력적이면서도 맹목적인 애국심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오직 진리 안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

p.49-50 흥미롭게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최소한 네 가지 측면에서 오랜 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이 주장해 왔던 주제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첫째, 다른 선지자들처럼 예수님도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하셨다. (중략)
  둘째, 예수님은 선지자적 전통에 따라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강조하셨다. (중략)
  셋째, 예수님은 앞서 간 선지자들처럼 불의와 위선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다. (중략)
  넷째,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가일층 강조했다. (후략)

저자는 위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정리했고, 난 동의하던 내용들이다. 종교화된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이것이 그 중심 메세지라고 믿기에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여기서 큰 차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가 과연 이러하다면 예수님은 사회에서 왕따가 아니라 사회에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신다.


선교

p.63 사람들이 낯선 이와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다.

p.217 물론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선교적 차원을 뛰어넘는다.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관계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사역만 행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계의 의미를 보충해서 사용하면 '하나님의 선교'라는 표현은 여전히 많은 가치를 지닌다. 사실 선교를 통해 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면 얼마든지 참된 관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온갖 프로그램으로 영토가 확장되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화해의 작전 만이 하나님 나라를 넓힐 수 있다. 
한국은 선교 강대국이라는 착각이 난무하는 이 시대, 우리 선교사들의 독단적이고 몰이해적인 선교가 현지인들로부터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면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어 관계 속에서 꽃을 피어내고 있는 선교는 분명 절대적인 환영을 받고 있다. 이 극과 극의 반응 속에도 해법이 분명 있다고 본다. 


표적

p.101 표적과 기사는 수학적이거나 현실적인 테두리 안에서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경계를 구분하는 우리의 기계론을 와해시키고 전에는 불가능했던 미증유의 무엇인가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다. 이렇듯 표적과 기사는 은밀히 진행되는 선한 역사를 통해 희망의 힘이 우리를 침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수단이다.

표적과 기사?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증거를 자기를 변호하거나 증거하는 데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증 앞에 더 나아가지 않는다.


평화

p.116 로마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연약함과 미련함을 드러내셨다. 하지만 그분의 십자가는 인간의 악한 의도를 좌절케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악의 제국과 종교 및 인간의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화해의 운동,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다.

p.157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그러한 엄청난 대가를 의식하고 황제와 해적의 차이는 소유하고 있는 무기와 배의 숫자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가혹한 고문과 무자비한 처형이 아니라 왕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는 정복의 평화가 아니라 화해의 평화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반도들을 처단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평화를 이루었다.

p.190 기존의 도덕적 원칙은 적절한 복수를 허용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복수를 뛰어넘는 삶, 즉 화해를 촉구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스몬드 투투, 넬슨 만델라, 인종 학살 이후의 르완다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가르침을 근거로 불의에 항거하는 새로운 방법들이 발전했다. 예를 들면 비폭력 저항주의, 갈등 해결, 적극적인 평화 조성 등이다.

p.218 '하나님의 잔치'는 배타적인 잔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아우르는 잔치다. '하나님의 잔치'는 다툼, 불평, 증오, 경쟁을 불식하고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함께 즐기게 해준다.

p.240 평화주의나 '예비적인 폭력 축소 이론'의 지지자나 상관없이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과 폭력이 종식되고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나 같다.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곧 평화를 만드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우리의 꿈을 하나님의 꿈에 일치시킨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로마군을 몰살했다면 예수님을 닮은 우리들은 저 이교도들을 몰살하는데 쓰임 받을 것이다. 그만한 지옥도 없겠다. 하지만 예수님은 화해운동의 모델을 보여주셨다. 서양이 쌓아온 패권주의의 기독교는 이단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종교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바울

p.123 바울은 나중에 에베소에서도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행 19:8)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를 전파"(행 20:25)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p.150 바울 서신의 핵심 내용 가운데는 바로 이와 같은 주제,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왕국 안에서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가 깊이 있게 다뤄지고 있다.

바울도 그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동참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다. 바울은 바로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한 것이 되겠다.


종교

p.24 예수님의 비밀 메시지는 놀라운 계획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그분의 목표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예술적, 경제적, 지성적, 영적 혁명이었다.

p.134 예수님의 영향력은 종교라는 울타리 내에서는 물론 그 밖에서도 동일한 힘을 발휘한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여러 곳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를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삶의 길이 아니라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신앙 체계나 의식 규범으로 생각하는 순간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p.311 신학자들은 기존 질서를 비판하기보다 추상적인 관념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좀 더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가 '정사와 권세'를 뒤집어엎기 위해 왔다고 강조했지만 당시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세상의 권세와 깊은 관계를 맺고 말았다.

p.314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도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는 그와 같은 위험성을 이해했다. 그는 "종교보다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더 피해를 가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기독교가 바로 그런 종교가 되고 말았다. 그런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생각지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종교로써의 기독교이기보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대안이 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종교적인 기독교가 되게 하는데는 분명 권력의 하수가 되었던 시대의 신학자들의 자세가 막대한 부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권력 밖으로 나와 진짜 기독교를 전할 때다.


믿음

p.173 의학, 법률, 예술, 음악, 무술 등의 경우처럼 믿음도 실천을 통해 그 능력이 더욱 향상된다. 믿음의 실천에는 구제, 기도, 금식 등이 포함된다. 그런 활동은 마치 운동 연습과 같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단단해진다. 믿음도 실천을 통해 단련되면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 즉 꿈조차 꾸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믿음을 몽환의 경지에서 이루어 가려고 하는 몇몇 성도들에게 이 글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믿음을 훈련하고 싶거든 삶 속에서 해야 한다.  방언은 사랑 없으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백날 설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젠 몸을 움직여라. 방언이 진짜 하나님의 언어였음을 증명해야 한단 말이다.


p.137 단순한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회사를 통해 더욱 확장되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공정하고 부지런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태도로 회사를 이끄는 한편 모두가 자부심을 갖고 한마음이 되어 서로를 존경하고 즐겁게 일하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직원들과 고객이 하나님 나라를 의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부분이다.  그래 이거다.  이 반대로는 과거 이랜드가 비정규직을 전원 해고시킨 예가 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아비규환 속의 지옥이다.  교회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웃들의 마음에 심어줄 수 없다면 어떤 선교든 파괴적이라고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꿈

p.213-214 '하나님의 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죄와 악에 대해서도 적절한 표현이 가능하다. 즉 죄와 악은 하나님에게는 일종의 악몽과도 같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감옥, 유괴, 아동 학대, 인종 차별, 탐욕, 가난, 오염, 착취, 속박, 혼돈을 꿈꾸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유, 창의성, 자비, 정의, 관대함, 평화, 다양성, 조화를 꿈꾸셨다. 
(중략)
  사실 이 표현은 1963년 8월 28일 링컨 대통령 기념관의 계단 위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만들어냈다. 그의 꿈은 하나님의 꿈이었다. 그의 꿈이 그토록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킹 목사처럼 불의, 부패, 압제, 인종 차별을 비롯해 여러 형태의 사회악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의 꿈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혁명(또는 혁신 운동)'이라는 표현으로 발전한다.

구약의 율법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을 어렸을 때 많이 가졌었다.  그리고 그 율법서는 편집된 설교 등을 통해 올바르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율법서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인생이 잘 맞춰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꿈', 이것이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 되어가고 있다.


요한계시록

p.261-262 요한계시록의 본래 독자들은 당시의 종교적인 권위자들과 로마 제국에 의해 언제 박해를 받을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와 공공 기관을 비판하는 말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혁명을 부추기는 문서를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되면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될 것이고, 그렇다고해서 압제의 상황을 말과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압제자들의 억압과 통제와 위협이 거침없이 자행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그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 있다. 바로 억압받는 자들의 문학, 또는 묵시 문학으로 불리는 문학적 장르를 통해서다. 
(중략)
요한계시록이 머나먼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라면 본래의 독자들은 물론이고 이후 세대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런 경우라면 한 세대의 독자들, 즉 우연히 예언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살게 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책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억압받는 자들의 문학이자 늘 변함없는 타당성을 지닌 경고와 약속이라면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감과 지혜와 격려를 제공하는 책, 즉 역사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강력한 책이 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종교적이고 몽환적인 해석을 멀리하고, 실제 그 책의 영향력을 탐구하는 것은 쉽고 상식적이다. 요한계시록이 당시의 정치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또한 오랜 종교의 눌림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일수도 있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기본만 이해한다면 무릎을 딱 쳐야할 부분이겠다.


 

예수님의 숨겨진 메시지는 본래 예수님이 정말 말씀하시고 싶은 메시지이다. 그것은 종교적이고 몽환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이고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타락한 세상에 세우겠다는 선포였다. 돈과 권력과 섹스로 얼룩진 세상에 예수님은 그 모든 것에서 자유케 하는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것은 구약에도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꿈, 하나님 나라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식은 정말 지루하다. 화해를 먼저 청하고, 용서하고, 기다려줘야 한다. 그것에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십자가 신앙이라 부를만 하다. 저자는 그 질문에 답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p.317 예수님의 메시지가 노예 제도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약 1,800년, 여성의 존엄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100년, 환경 문제를 언급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또다시 100년이 걸렸다면 아마도 그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는 항상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