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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이덕주, Love wins 사상의 사회적 접근편


저자 이덕주는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한국 교회사와 아시아 교회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 소장이다. 기독교 역사에 대한 책을 다수 출간했으며, 통일에는 실제적인 활동을 하는 분으로 책 속에서 그 분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에 대한 우려로 시작한 저자는 '빨갱이', '적군'의 것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성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찾도록 돕는다.  제목부터 보고 지레 겁먹을 사람들은 책을 읽다보면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가 낯설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래도 자꾸만 반복되는 '사회주의'라는 말에 섬찟 놀랄 수도 있을 것 같다. 60년 동안 반공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성경 안에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사회주의'의 언급은 결국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길임을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랍 벨의 <사랑이 이긴다>를 읽었다. 이 책은 내게 마치 Love wins의 적용편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p.238 사마리아를 통해 유대와 갈릴리가 만나고, 유대교인과 이교도가 만나 교류합니다. 마치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한강대교,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의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화개장터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신학', '가교 신학', '장터 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기독교 사회주의는 서로 다른 배경과 성향을 지닌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대화와 교류를 통한 조화와 협력을 추구합니다. 특히 민족 분단 상황에서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벽이지만 또한 그곳을 통해 남북 왕래가 이루어지는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와 같이, 기독교 사회주의는 '비무장 신학'으로서 60년 넘게 자본주의만 경험한 남쪽과 사회주의만 경험한 북쪽 사이에서 양쪽 모두와 '연결되면서 구분되는' 제3의 영역을 구축하고 평화와 공존의 공간을 넓혀 감으로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갈등과 분열, 불신과 증오, 죽음과 폭력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화해와 일치, 공존과 협력,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는 '영의 생기'(창 1:2, 겔 37:9)가 되어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들의 호흡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끝부분에 이런 글을 실었다. 양극단으로 가버린 신학과 한국 사회는 대화할 줄 모른다. '기독교 사회주의'가 과연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할만 할까? 

p.31 기독교 사회주의는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기독교,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 모으는 것보다 '나누는 것'에 우선 가치를 두는 기독교를 지향합니다. 이런 기독교라면 남쪽 일반 사회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음은 물론이고 반세기 동안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 아래 살면서 사회주의 체질에 익숙해 있는 북쪽의 동포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p.44 노박이 말한 민주적 자본주의는 인간적 정이 넘치는 자본주의입니다. 경쟁에서 패한 소외계층에 냉소하고 냉정한 '물질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빈곤층에 따뜻하게 손길을 펴는 '인간적' 자본주의입니다. 다른 말로 '기독교 자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으나 자본주의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적 빈곤층을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고 세워 줌으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그런 자본주의입니다. 그런 자본주의라면 북쪽의 형제자매들도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통일 운동가 답게 북쪽 형제자매들을 포용할 수 있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사회주의인가? 그냥 기독교지. 이것이라면, 기독교 사회주의는 결국 배타적인 종교행태를 벗어나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이겠다.

p.53 혁명의 폭력성도 문제지만 기득권층의 이익만 대변하려는 교회의 현실 인식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 아니다!" 외치면서 대안 모색에 나선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프레스턴이 언급했던 바, 모리스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입니다.


p.62 프레스턴이 말한 도덕적 근거는 모리스가 사회 갈등과 분열을 치유할 절대적 근거로 제시하였던 하나님의 질서 그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애썼던 모든 사람들이 행동의 제일 원리로 삼았던 황금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바로 기독교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질서이자 원리입니다.

늘,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이라 믿어왔던가? 기독교 사회주의는 그것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본다. 나는 이것을 성경적 현실주의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이 이제 기독교 사회주의가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질서로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p.66 불만은 불평을, 불평은 불안을, 불안은 폭력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불만을 다스리지 않으면 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인 불만이면 방화 정도로 끝나지만 집단적인 불만은 폭동으로 연결됩니다. 소득 불균형이 불가피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균형 분배를 담보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과 장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에서 출발합니다.

아직도 파이 크기를 운운하는 자본주의 광신도들이 교회에 남아 있는 이상, 이 말의 본 뜻을 알기나 할까? 사실 불안을 평안을 바꾸는 일들은 성경에 많이 나와있다. 빨갱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p.77 만나는 본래 하나님의 것. 내가 한 것이라면 거두는 수고뿐. 어쩌다 많이 거두었는데 어차피 먹고 남은 것은 썩어 없어질 것. 그러니 한 끼 분량조차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 나눠 주어 그도 살고 나도 살고, 이것이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른지.


p.81 금전적인 빚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지만 사랑의 빚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조금 여유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만나를 나눠 주는 사회, 그래서 사랑의 빚으로 서로 얽히고설켜 모두가 행복한 사회, 바로 기독교 사회주의가 그리는 세상입니다.


p.93 여기서 죄 지은 자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오페일레마타'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었으니 우리가 지은 빚을 탕감해 주시옵고"입니다.

무서운 기도입니다.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서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사람 사이에 채권-채무 관계를 먼저 해결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만나의 정신, 용서의 정신이 기독교다. 모두를 예수의 사랑의 빚진 자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전도라고 생각한다. 선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만나의 정신, 용서의 정신이 없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이 잘 된 일이라고 믿는다. 

p.103 기독교 사회주의는 이런 토지공개념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토지공개념이 사회주의적일 뿐 아니라 성서적이고 신앙적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적 의미에서 토지공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미국의 경제사상가 헨리 조지(Henry George)에게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p.110 "하나님만이 백성과 땅의 주인이다"라는 웨슬리의 말에서도 토지공개념이 기독교적인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하나님의 분배 질서를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 재림을 대망하며 사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의무인 것과, 자신과 이웃은 물론 후손까지 파멸시키는 탐욕과 낭비를 경계함으로 희년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적당한 생산욕구와 소비는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지만 이기적인 탐욕과 낭비는 공동체의 평화를 파괴할 뿐입니다. 바로 기독교 사회주의가 우려하는 대목입니다.

토지공개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역시! 나는 희년 정신과 토지공개념이 성경적이고, 대형교회는 부끄럽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싫어하지만 이보다 뭐가 더 성경적이란 말인가? 대천덕 신부님의 <토지와 경제정의>도 읽기 참 쉽다. 이 책을 추천한다. 

p.122 어느 시대든 붕괴는 내부 균열로 시작되어 외부 충격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정의와 평등은 구현되어야 합니다. 분열 왕국시대와 왕국 멸망 후 포로시대를 살았던 예언자들이 소외계층과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억압에 대해 그처럼 목청을 높여 경고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p.1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예레미야 34장 17절)"

안식년과 희년에 실천해야 할 빚 탕감과 노예 해방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죄가 결국 남의 나라에 노예로 잡혀가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활동한 에스겔의 해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많이 실험되었다. 족장시대부터 왕정시대까지. 그러나 그들은 배부른 돼지로 살아가기를 결정하고 하나님을 등진다. 하나님 나라에는 법이 있었다. 서로! 함께! 잘! 살아가는 법. 그 법을 종교적인 의식으로 치부하며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아니 죄다. 다시 그 죄를 반복하게 하는 기독교를 만들어가는 주범이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열거한다.  

p.128 메시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 날이 오면"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불신과 불만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함께 손을 잡고 나누며 살아가는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메시아 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중략)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상극이지만 이 둘이 공존과 협력을 이루어 나눔과 평화의 인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꿈, 인류 역사에서 평등과 정의를 구현하려는 사회주의 실험이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남아, 현실 영역에서 실현 불가능한 그 가치를 종교적 영역에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바로 역사 속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포기할 수 없었던 꿈입니다.


p.136 부자들만 사는 빌리지도 아니며 빈민들만 사는 꼬방동네도 아닙니다. 부자와 빈민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대동(大同)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사야가 꿈꾸었던,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모든 곳에서 해 됨이 없고 상함도 없는" 거룩한 산(聖山)에서 이루어질, 메시아 공동체입니다(사 11:6-9).


p.140 만나 공동체는 말씀 공동체였고 구체적으로 안식년 공동체, 희년 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은 무한경쟁의 현실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충돌을 해소하고 절제와 관용, 협력과 일치, 나눔을 통한 평등으로 구현될 평화 공동체였습니다. 그 말씀 공동체가 신약시대에 접어들면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 것입니다.


p.141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워지고 그 뜻대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으로 가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천국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기대는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p.142 구약시대 사람들이 실패한 말씀 공동체, 만나 공동체, 안식년과 희년 공동체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그 실패 원인이었던 탐욕의 유혹을 물리치고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사회악과 부조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임할(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p.147 비록 외경에 나오는 기록이라 서구 교회 중심의 교회사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지만, 동방 기독교 전승에서 항상 그 중심인물로 언급되는 도마의 인도 선교 이야기는 하늘나라 건설이 이 땅에서 재물을 어떻게 쓰는지에 달려있음을 보여 주는 비유로 남아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p.156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이루어지면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혁을 이끌어내고, 공동체 의식으로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극복하여 물질적 세속 사회가 영적인 공동체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변화와 전환을 회개라 합니다. 그런 변화를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께서 천국을 누룩과 겨자씨로 비유하셨습니다(마 13:31-33).


p.158 만나 공동체에서 율법으로 이루어진 균등 분배가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천국 사람이 되느냐 아니냐가 판가름 납니다.


p.163 자신에겐 부요하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 사회적 약자와 빈곤층에 무관심한 '물질적 부자들'에게 천국은 '머나먼 나라'이지만,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웃에게 마음과 물질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은 '영적 부자들'에게 천국은 '이미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p.172 과연 삭개오는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 천국에 들어간 부자,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불가능한 가능'의 샘플이었습니다. (중략) 기독교 사회주의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에서 평등과 평화 공동체 건설의 가능성을 찾습니다. 신약성서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성령'이라 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런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행 1:8). 오순절 사건과 함께 제자들이 건설했던 '성령 공동체'가 바로 그렇게 해서 가능했습니다.


p.195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p.200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실천하는 믿음, 그것이 '천국 입장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입장권을 가진 사람은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이 땅에서 천국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마 7:21)


p.204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영성에서 비롯된 의지와 능력으로 환란 중에 처한 이웃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릴 가장 소중한 정결한 경건입니다. 참된 경건은 세속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영성을 갖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실천적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을 '천국'이라 하고 교회는 그런 천국을 지상에서 경험하는 공간과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p.215 세상에서는 입은 옷의 색깔과 가격에 따라,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대접이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행동거지도 다르지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어린양의 혼인 잔치, 천년왕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양식(생명수)을 먹으며 같은 찬송을 부를 뿐입니다. 그리하여 완전 자유, 완전 평등, 완전 평화가 구현된 세상, 곧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이 이루어질 세상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p.221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또는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끝내고 주님께로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땅에서 지키고 실천해야 할 유일한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영원한 '새 계명'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율법이 없고 계명이 없으며 신앙도 없습니다. 이 계명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천애린'(敬天愛隣)의 믿음을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신앙생활 원리로 고백하는 이들의 실천 강령입니다.


p.230 즉 '보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씀을 눈으로 읽는 단계에 머물렀지만 사마리아인은 '보고'(눈으로) '불쌍히 여겨'(마음으로) '가까이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주막으로 옮겨'(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과연 누가 '영생'의 관문을 통과하였을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p.231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뭔가 통하는 이웃이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사랑해서 이웃으로 만드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 천국을 만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사회주의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신다. 그 영광은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 뜻대로 되는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서민도 다 알 수 있고, 이방인도 다 알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그동한 모호한 종교로 기독교를 몰아가지는 않았나? 

예화로 제시된 이 두 이야기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본래 한국에도 성경다운 기독교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p.209 그런 그의 이야기는 한글 신문 <대한그리스도인회보>(1900. 6. 6)에 실렸습니다.

강화 홍의 교우 종순일 씨가 자기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심을 깨닫고 무한 감사하며 또 성경 말씀을 생각하고 스스로 가로대 하나님께서 나의 천만 냥 빚을 탕감하여 주셨으니 나도 남이 내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청하여 놓고 성경 말씀으로 연설하여 전도한 후에 빚 준 문서를 그 사람들 앞에서 즉시 불을 놓으니 탕감하여 줌을 입은 자들이 크게 감복하여 영화를 하나님께 찬송하고 서로 공론하되 세상 사람이 백지 없는 빚도 있다 하여 기인취물(欺人取物)하거늘 예수교를 믿는 사람은 자기 돈까지 버려 남에게 적선하니 참 거룩한 일이라 한다더라.


김씨 부인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드문 일"이란 제목으로 <신학월보>(1903. 7)에 실려 있습니다.

강화 읍내에 김씨 부인은 연방 팔십에 자녀와 친속이 없고 홀로 과거하여 다만 복섬이라는 여종을 데리고 세상을 지내더니 일일은 예수씨의 복음을 듣고 스스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주를 믿기 작정한 후 언문을 알지 못함으로 성경을 보지 못하여 주야근심하고 날마다 언문을 힘써 공부하여 나중에 언문 성경을 보기에 이르러 성경 뜻을 상고함에 종두는 것이 또한 큰 죄인 줄을 깨닫고 가라대 우리의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한 형제라 내가 어찌 감히 하나님 앞에서 주인이 되어 죄를 범하리오 하고 하루 날은 교중 형제를 청하여 그 종 복섬이를 불러 앉히고 마태복음 십팔장 십오절부터 이십절까지 읽은 후에 좋은 말씀으로 몇 마디 하신 후에 종 문서를 불사르고 그 종에게 일러 가라대 내가 금일부터는 너를 종으로 알지 않고 내 딸로 아노라 하고 주일마다 한가지로 예배당에 열심으로 다니시니 종 되던 여자가 기뿐 마음이 충만하여 친어머니같이 섬기며 날마다 온 집안이 화목한 것이 충만하니 하나님께 만만감사할 일이로다.


사실 우리는 혐오증을 교육한 한국 역사 가운데 있다. 반공교육이 그랬고, 교리교육 등도 그랬다. 그리고 한 번도 제대로 가르치려는 운동이 근사하게 등장한 적이 없다. 주류는 늘 잡기술을 가르치는 것들 뿐이었다. 신학 밖에 안 한 사람들이 이래저래 사회현상에 대해서 막 가르치는 동안에 성도들은 외눈밖이 사랑을 하게 됐다. 개안수술을 해줄 때다. 편협함이 만들어낸 오류들을 깨어있는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야 할 때다. 성경과 사회, 그 간극을 좁혀줄 수 있는 책을 여기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