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알고,<당당하게 믿어라> 책 읽자.
당당하게 믿어라 – 랍 벨
저자소개
미시건 주 그랜드래피즈 마즈힐 성경교회의 담임목사인 벨은 기독교의 정통적인 입장을 따르면서도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현실 세계에 순응해서 살기를 바라셨으며, 종교라는 틀을 싫어하셨다고 랍벨은 주장한다.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를 쓴 저자로 2011년 한국에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역 기관인 Nooma를 이끌고 있다. (www.nooma.com)
책소개
본래 이 책의 제목은 『Velvet Elvis, Repainting the Christian Faith』이다. 엘비스는 벨벳을 입지 않는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벨벳 입은 엘비스가 진짜 엘비스라고 우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자는 현대의 기독교 신앙은 벨벳 입은 엘비스와 비교될 수 있다고 본다. 오래된 옷을 입은 세련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그의 도전적인 필체가 기대되는 제목이다. 그러나 출판사인지, 번역가인지 모르지만 제목을 너무 벨벳 입은 엘비스처럼 바꿔 버렸다. 웩!
Keyword1 변화
칼빈은 종교개혁 당시에 Reformed 대신 Reforming을 사용했다. 종교는 계속적으로 개혁해 나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p.22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신앙하는가? 이것이 논쟁의 핵심 문제다. 진짜 문제는 믿음의 유무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이다.
앞서 읽었던 『숨겨진 예수님의 메시지』, 그리고 같은 저자가 쓴 『사랑이 이긴다』,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이다. 우리가 믿는 것만이 옳다는 닫힌 생각은 결국 종교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싸움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대부분의 교회가 열정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에 대한 고민이 늘 부족했기 때문이다.
Keyword2 종교 혹은 실재
p.26
예수님의 방식은 종교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곧 진정한 현실에 자신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이다.
p.27
기독교 신앙의 교리는 핵심을 이해하도록 도울 뿐이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신앙의 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균형 잡힌 시선을 잃지 말아야 한다.
p.32
교리는 똑똑한 하인인 동시에 지독한 주인이다.
p.47
모든 올바른 교리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언제나 논쟁이 될 수 밖에 없는 주제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율법주의자, 사두개인 모두와 대립각을 세워왔던 예수의 초점이 약자들에게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산상수훈이라는 핵심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는 종교이기보다 충분히 사회변혁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사명기관으로 보인다.
Keyword3 성경과 해석
p.63
한 랍비의 일련의 규칙과 목록은 토라에 따라 사는 법에 대한 그 랍비의 해석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그 랍비의 멍에라고 불렀다. 어떤 랍비를 따르는 것은 그 랍비의 해석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의도하신 바와 가장 가깝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랍비를 따른다는 것은 곧 그 랍비의 멍에를 멘다는 의미였다. 한 랍비는 자신의 멍에가 쉽다는 말까지 했다(마 11:30).
p.68
성경은 공동체의 책이다. 성경은 공동으로 글을 쓴 사람들 속에서 나왔고, 많은 경우 공동체를 향해 씌어졌다. (중략) 성경에 등장하는 ‘너희’는 복수다.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터무니없이 빗나간 해석이나 의견을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그 사람의 실수를 막아주었다.
p.91
대체로 개신교의 입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 세기에 걸쳐 특정한 편지와 글들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그 책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옛날에 작성된 정경 목록들을 대할 때, 개인의 견해이건 공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건 그 목록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구속력이 있는 결정이 아니라 세월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느슨한 합의가 이루어져 왔다는 증거로 여겨야 한다.
성경무오설은 무엇을 더욱 입증하는 학설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교리에 크게 좌지우지되는 제도권 교회들의 권위를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은 유연성 있게 정경화 작업을 해왔고, 또한 유연성 있게 해석되어왔다. 따라서 문을 닫고 내 것만 옳다는 교리전쟁에서 벗어나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한몸’, ‘한교회’로 회복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기독교 우파와 좌파가 함께 성경을 묵상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날들을 기대해 본다.
Keyword4 진리
p.108
진리가 모든 곳에 있고 온 당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할 뿐 아니라,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발언을 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롬 2:14). ‘이방인’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고 ‘율법’은 성경을 말한다. 즉 바울의 말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꾸준히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나 성경의 지시를 전혀 받지 않고도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고 보았다.
진리는 모든 곳에 있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p.113
나는 기독교 바깥에서 진리를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기독교 신앙을 송두리째 버린 젊은이들을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중략)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건 진리를 만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믿음이 더 확장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디서 진리를 발견하건 그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p.115
예수님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방식,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가 존재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세상의 진정한 원리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종교의 취지는 궁극적인 실재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러한 종교 행위와 의식이 실재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그 표현이 마음에 든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진리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으로 여겨 왔던 시간들이 너무 길다. 먼지 낀 벨벳 정도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예수,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구원을 노래하셨는가? 그분이 길거리에서, 산 위에서, 바다 위에서 펼치신 구원의 노래가, 그 진리의 향연이 나와 우리와 모두에게 동일하게 기쁜 소식이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돌무덤 안에 숨겨도 예수님은 그 밖에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
Keyword5 구원과 천국
p.151
랍비들은 하나님과의 조화를 ‘올람 하바(olam haba)’라 불렀다. 번역하면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이다. 구원은 점점 더 하나님과 조화롭게 사는 삶이며, 영원히 계속될 과정이다.
p.152
우리 죄가 용서 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법적 거래로만 구원을 이해하면, 구원의 본질은 다른 곳으로 가게 해주는 티켓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원이란 우리가 죽는 순간 시작되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을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고 말씀하셨다(요 5:2). 하나님은 언제나 계셨고 앞으로 언제까지나 계실 분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연결되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께 구원은 현재의 일이다.
p.153
구원은 우주 전체가 창조주와 다시 조화를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메시지를 제시하는 방식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 자체만큼이나 넓고 깊고 큰 운동에 합류할 수 있다. 바위와 나무, 새와 늪과 생태계. 하나님은 그 모두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
p.207
그리스도인은 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땅으로 내려온 새 천국에서 영원히 지낼 것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우리를 다시 만들고 계신다.
구원에 매달린 삶은 ‘구원파’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막달라 마리아를 보시고 자신에게 얽매이지 말고 가서 형제와 자매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부활, 구원 그 자체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빨리 깨달아야 한다. 이 패러다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환상을 보고 텐트를 짓겠다는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양을 우리가 바로 답습해버릴 수 있다.
천국에 대한 개념은 사실 많은 성도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요한계시록을 엉터리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천국은 하나님께서 지상을 통치하시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지 못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천국을 노래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Keyword6 구원, 그 이후
p.128
그리스어에서 ‘용서하다’라는 단어는 ‘보내버리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입히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지워진 빚을 짊어지고 살게 된다. 용서는 그러한 빚을 거부하는 행위다.
p.231
누가 택함을 받았건 예정되었건 선택되었건, 초점은 택함 받고 예정되고 선택된 사람에게 있지 않다. 하나님의 초점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있다.
영화 <밀양>을 보고 얼마나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했던가? 구원이 종착역인 사람들은 그렇게 너무나 쉽게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사람들을 생채기 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 우리가 용서 받은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구원받은 자, 탕감 받은 자 혹은 용서 받은 자가 주인이 베풀어 준 대로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지 못하면 어떤 형벌을 받을 지에 대해 겁먹고 떨어야 할 것이다.
Keyword7 전도
p.229
예수님의 메시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대신 예수를 따르는 이 공동체를 직접 체험해보라고 부드럽게 초청했다.
p.233
그리스도인들이 거리에 나가 세상이 얼마나 나쁜지 불평하며 시위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해로울 뿐이다. 그와 같은 행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p.236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그들을 설득해 교인으로 만들려는 욕심을 포기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교회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철저한 섬김과 연민의 행위로 자신을 내어줄 때 예수님의 방식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하기 위해 교회는 모든 사람을 안과 밖,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신자와 불신자의 범주로 나누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p.237
기독교 공동체는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인상을 줄 때가 많다. 결국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내가 품은 복음은 과연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인가? 나를 통해 나가는 복음이 기회주의자들의 자기자랑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훼손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언변이 뛰어나서 한 번 말씀하시면 다 설득이 되었을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끝내 배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긴 장면이 내게는 가장 큰 복음이었다는 사실을 나누고 싶다.
Keyword7 교회
p.165
기독교 공동체 내의 수많은 리더들이 너무 빨리 움직이고 너무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너무 많은 일을 이루어내기 때문에 결국 껍데기만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직하게 다룰 여력이 없는 것이다.
p.228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카이사르의 코 앞에서 하나님과 동역하여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대항문화집단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내의 누구도 굶주리지 않도록 서로를 보살폈다. 누구도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게 했다. 모두에게 충분하게 돌아가도록 챙겼다. 그들에게 부활은 추상적인 영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회적 경제적 현실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주(主)이고, 예수님의 능력과 본보기와 그분의 성령을 통해 세상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p.232
교회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궁극적인 관심은 교회 자신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사람들이다. 교회가 이 사실을 놓친다면 그것은 심장을 잃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공동체 교회를 꿈꾸는 나는 위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끈을 조여 맨다. 행사 뿐인 교회, 집에 돌아오면 허무한 교회가 아니다. 사랑뿐인 교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따뜻한 교회가 진짜 교회다. 그것은 돈과 외모로, 머리로도 못 가는 진짜 하나님 나라다. 교회를 하나님 나라처럼 만드는 일을 실패하면 교회는 실패한 것이다. 내 자신에게 묻는다. 그런 교회가 아니라면 멈출 준비가 되었는가? 두렵고 떨리는 질문이다. 예수님이여, 그 길로 가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이 내게 채찍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그림자가 나로 매일 눈물 나게 하소서. 그 그림자를 따라가기에 바쁜 인생으로 살기를 소원 하나이다.
랍 벨은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기독교가 가진 구태를 벗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서론에서 말한 대로 정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가 중간되는 지점에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p.186
위대한 랍비가 자신의 제자로 당신을 부르신다면, 당신이 자신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그분의 탈미딤,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의 이야기들을 읽어보라. 예수님이 답답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무엇인가? 제자들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이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까지 하신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랍비의 교육 방식 전체는 제자들에 대한 랍비 자신의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다.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우리가 이 패역한 땅에 천국을 세우길 원하신다. 무한 경쟁 속에 죽어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것이 복음 앞에 주어진 우리의 최대 과제이며 지상 명령 성취에 가장 큰 액션이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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