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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진<여운형 이야기> 요약 및 견해

개인의견:: 미국에서 정치 깡패로 잘 알려진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정도로 그렇게 인물이 없었을까? 아닙니다. 훌륭한 인문들이 좌익과 우익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을 뿐입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좌우로 나뉘어 서로 물고 뜯는 것일까? 여기 그 물고 뜯는 한 가운데서 평화 통일을 외쳤던 한 인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좌우가 나뉘게 되었는지, 왜 친일파가 득세하는 대한민국이 되었는지도 알아볼 수도 있어서 매우 유익합니다. 비록 어린이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대학생 혹은 성인들에게 무척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사회와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주로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2000년 방송위원회 프로그램 기획부분 대상을 받은 <동강 내셔널트러스트 1년의 기록>, 이성과 본능의 문제를 다뤄 국내 최초로 포르투갈 국영방송에 수출된 <고백>, 연어를 통해 남북 화합의 주제를 다뤄 일본 NHK에 수출된 <연어를 기다리는 사람들>, 학교 체벌의 문제점을 지적한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들이 있습니다. 마을, 사회, 국가 공동체를 좀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천들을 해왔으며, 현재는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차장과 서울시 교육청 곽노현 교육감 정책보좌관으로서 행복한 서울 교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1년)

 

21쪽 아씨 마님은 그제야 태몽 얘기를 꺼냈다. 환한 태양을 안는 꿈이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얘기를 듣고, 몹시 특별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지는 기뻐하며 꿈속에서 태양을 보았다고 해서 꿈 '몽(夢)'과 태양 '양(陽)'자를 써서, 갓 태어난 손자에게 '몽양'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그래, 너는 태양처럼 환하게 우리 민족을 비추는 인물이 되어라."

 

23쪽 아버지가 종뿐 아니라 동네 상민들까지도 잡아다가 때리는 모습을 보면서, 운형은 상민들이 너무 불쌍했다. 운형은 점점 계급 제도에 대한 불만과 문제 의식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다.

 

27쪽 운형의 할아버지 규신과 작은 할아버지 규덕은 동학 사상을 널리 퍼뜨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규덕은 동학의 기본 교리 책인 <용담유사>를 지었고, 규신은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과 비밀 모임을 갖곤 했다.

 

32쪽 "아버지, 저기 저 글씨가 무슨 뜻인가요?"
운형은 피난을 가다가 동학군의 깃발에 쓰여 있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란다."
아버지의 대답을 들은 운형은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래 맞아. 할아버지는 나를 위하고, 백성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셨어.'

 

43쪽 운형은 학교가 있는 경성부터 고향인 양평 묘꼴까지 말을 타고 다녔는데, 길가에 밥을 먹고 있는 농민을 보면 말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그 앞을 지나갔다. 흙먼지가 날릴까 봐 배려한 것이었다.

 

46쪽 운형은 민영환의 유서 <국민에게 고함>을 읽고는 목 놓아 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형은 통신원이 될 수는 없었다. 한 달만 학교에 더 다니면 통신원 기술관으로 일할 수 있었고, 월급으로 상당히 많은 금액인 27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운형은 우무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52쪽 운형은 광동 학교에서 자신이 배웠던 신학문은 물론 성경도 가르치고 매주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틈틈히 클라크 선교사가 설교하는 경성 승동 교회에 나갔다. 운형은 거기서 기독교를 믿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산 안창호를 처음으로 만난 때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안창호는 그날 '대한의 장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오늘의 한인은 몽매(蒙昧)파, 절망(絶望)파, 회의(懷疑)파 세 파 뿐이고 진정한 애국자와 일꾼이 적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안창호의 연설에 운형은 크게 감명받았다.

 

53쪽 1908년 3월, 삼년상을 끝낸 운형은 그동안 자신이 결심했던 일을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먼저 손수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조상의 위패인 신주를 모조리 땅에 묻었다. 양반 가문의 종손이 그런 행동을 했으니 주변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4월 17일, 운형은 집안의 종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종들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운형이 이번에는 무슨 일을 할까 궁금해하며, 모여들었다. 드디어 운형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을 다 해방하노라. 지금부터 각기 자유롭게 행동하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그런고로 '서방님'이니 '아씨'니 하는 호칭부터 싹 없애라.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형제요 자매다. 주인과 종의 의리는 어제까지 있던 풍습이다.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가라."
"지금 서방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 순간, 운형은 종 문서와 빚 문서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92쪽 "장관은 한일 합병을 회사 합병에 비유했다. 난 그 의견에 절대 반대다. 한일 합방은 결코 우리 민족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열 명도 되지 않는 매국노 패거리의 소해엥 불과하다. 합병 이후 벌어진 의병의 봉기와 최근 3.1 만세 운동이 증명하고 있다. 즉 합방은 강제로 이뤄진 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합방이 아니고 병탄이다. 일본은 이 병탄이 조선인의 행복을 위해, 동양 평화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조선인의 재난이고 치욕이며, 동양의 화근과 불신은 이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가 장관은 조선을 점령한 이유가 일본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가 장관은 할 말이 없었다.

 

96쪽 "앞으로 조선 민족은 신세계 창조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할 기회를 반드시 가지게 될 것이다. 3.1독립 만세가 입증하고 있다.주린 자는 먹을 것을 구하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법. 그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그것은 곧 생존의 자연적인 발로이다.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듯이 똑같이 조선 민족에게도 생존권이 있다. 생존의 자유와 평화의 존속을 위해 민족 독립을 바라는 것은 신의 섭리이다. 일본은 이 같은 하늘의 이치를 역행하고 있다. 일본이 생존권의 자연적 발로로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조선인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탄압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기자회견장에 온 조선 유학생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132쪽 운형은 조선 체육회 회장으로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7명의 선수들을 모아 놓고 환송회를 열었다. 물론 아들처럼 여기던 마라톤 선수 손기정도 거기 있었다.
"제군들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뒷말을 운형은 잇지 못했다. 눈물을 삼켜야 했다.

 

152쪽 "조선총독부는 몽양 선생께 치안권을 넘기고자 합니다."
치안권을 넘긴다는 것은 사실상 정권을 넘겨준다는 것과 같은 얘기였다. 그리고 그 실권자를 운형으로 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운형을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유형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보았다. 운형이 조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방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155쪽 송진우는 임시 정부와 좌악이 입장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협력을 거절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송진우와 함께 하는 우익 세력에는 친일파 또는 지주들이 많았다. 친일파들은 해방 직후에 대중들 앞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지주들은 좌익 세력이 중심이 되어 토지 개혁을 일으키면 땅을 잃을까 두려워 좌익 세력을 적대시했다.

 

165쪽 10월 23일, 50여 정당, 200여 단체가 참석한 가운데, 통일 위원회는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로 바뀌었다.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한 독촉에는 운형을 비롯해 송진우, 박헌영, 안재홍 등 좌우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운형이 그토록 바라던 좌우가 함께 한 통일이 눈앞에 온 듯했다.
그러나 정작 좌우 통일을 이끌어야 할 이승만의 마음은 달랐다. 23년 만에 조국에 돌아 온 이승만에게 자기 편을 들어 줄 정치 세력이 있을 리 없었다. 이승만은 자기의 지지 세력을 만들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행정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던 경찰과 친일 관료들을 포함한 우익 세력과 손을 잡았다. 철저한 반공산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우익 세력을 통해 좌익 공산 세력을 제압하려 했다.

 

166쪽 운형은 국민 총선거로 구성된 의회에서 헌법과 같이 국가 수립을 하기 위한 중요 사안들을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정치인들 중 총선거를 제안한 정치인은 운형뿐이었다. 스스로 민중의 지지를 받는 다고 했던 좌익 세력조차도 미군정과 우익 세력이 권력과 돈을 걸고 선거 결과를 조작할 것이라 우려하여 국민 총선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우익 세력은 민중의 지지가 약하다고 판단해 총선거를 꺼려했다. 결국 운형의 제안을 어떤 정치 세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71쪽 신탁 통치안은 소련의 제안이 아닌 미국의 제안이었다. 미국이 최대 10년을 얘기했던 것을 5년으로 낮춘 것이 소련이었다. 즉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은 허위 보도였다.

 

172쪽 이때 친일파들은 신탁 통치 반대 대열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을 애국 세력으로 포장했다. 매국 세력인 친일파가 애국 세력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제 좌익과 우익의 분열은 너무나 깊어지고 말았다. 좌우 합작을 통해 민족의 단합을 추진했던 운형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175쪽 "어린이 여러분들은 이제 저 태극기를 다시 빼앗겨서도 안 되고, 숨겨서도 안 됩니다. 지금 저 태극기를 세계만방에 휘날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건강한 조선의 청년으로 자라나 주길 바랍니다. 내가 남산에 대해서도 북쪽에 대해서도 절을 한 일도 없고, 나한테 절 받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린이들만은 나한테 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194쪽 운형이 떠난 뒤 남과 북으로 갈라져 하나가 되지 못한 한민족은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도 운형이 이루려고 했던 한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의 큰 뜻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