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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라스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요약 및 견해

요즘 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말한다.  다원주의에 빠져서, 뭐가 옳고 그릇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고사하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 것이 일반화된 이 시대. 교회는 그 대안으로 제자훈련을 내세우며 말씀 없는 이 시대를 훈련을 통해 이겨내려고 하고 있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 ‘종교개혁시대의 영성’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일어버린 종교개혁 운동의 본질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읽기도 전에 기대감이 몰려왔다. 이 책은 종교개혁시대를 두둔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현시대의 교회가 추구해야할 바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종교개혁시대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영향력은 어떠한지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요약하여 이야기 하고, 현 시대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비교 언급하며 이야기하고 싶다.

  빛도 찾아볼 수 없는 시대에 빛과 같이 몰려온 것이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고전 복음주의의 영성의 탄생을 목도한 바 있다. 현대는 바로 그 영성을 알아야 하고 그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p.25).’라고 말하며 종교개혁이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시대의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필요로 하는 본질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기독 교회는 ‘어떠한 비판적입장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자세(p32).’를 지니도록 만드는 관성을 가졌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 종교개혁은 ‘그 근본을 놓고 본다면, 기독교의 정체성과 순전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였다(p.32).’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성’이라는 단어가 가톨릭의 종교 생활양식과 특별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구분을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가톨릭의 사이비성을 폭로하는 데 상당한 페이지를 할당하여 설명하고, 그와 기독교 영성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다시금 이야기 한다. 가톨릭이 저지른 만행 중, 성직자만이 ‘영적인 지위’이며, 나머지는 ‘세속적인 지위’라는 제한을 깨뜨리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차이는 그 지위가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직무 및 사역과 관련된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인의 지위에 대한 루터의 말을 인용해 설명했다. ‘4~5세기의 수도원 운동은 영성과 영적 권위의 문제에서 평신도를 소외시킨 것에 반발하여 일어난 하나의 저항 운동이었다(p.47).’ 반면, 종교개혁의 영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이로, 영적인 지도자를 내세우며, ‘믿음을 창조하시고 자라게 하시며 견고한 터 위에 서 있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기에, 신앙이 자라는 데 충분한 자양분이 잘 공급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p.50).’ 또한 더불어 상아탑 신학에 대해 거론하며, 평신도에게 촌평을 받을 뿐 아니라, 교회와도 멀어진 그 탁상공론보다는 현장, 현실에서의 영성이 바로 종교개혁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체험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에서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성경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만이 받았다는 계시에 도취되어 신앙 공동체에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부인하던 자칭 선지자들의 독재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p.61).’ 같은 맥락에서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 순전하고 신뢰할 만한 영성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이다(p.69).’ 라고 말하며, 종교개혁의 영성, 그 중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종교 개혁의 또한 중요한 점은, ‘현세를 향하여 적극성을 보였던 종교개혁자들이 제일 먼저 초점을 맞춘 곳은 국가와 사회라는 커다란 제도들이었다(p.76).’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존재하던 종교를 순결하고 새롭게 했다(p.77).’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각자 매우 다른 기대를 갖고 성경에 있는 그들의 뿌리로 되돌아갔다. 루터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중세 교회의 신학과 영성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츠빙글리는 초기 신앙 공동체와 윤리 및 종교 차원의 연대를 형성한다는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런가 하면 칼빈은 자신이 살던 바로 그 시대에 사도 시대의 교회 구조를 재창출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자신의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장자권을 기억하는 것이다(p.94).’ ‘츠빙글리는 성찬이 기독교 공동체의 토대가 되는 사건을 이야기 한다고 확언 했다. 성찬을 행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에 있는 가치와 열망들에 실체를 부여하고, 공동체가 한 몸이라는 자각과 공동체의 목적의식을 높이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p.95).’ 저자는 성장의 연속성을 주는 뿌리를 되찾을 것을 요구하며, 성경으로 돌아가고, 성찬의 의미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가 했던 이 말을 처음 접했을 그때를 잊지 못할 것이다(p.107).’ ‘십자가야말로 영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출구이고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나아가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 여정에 찾아온 고난과 고통 그리고 반대들은 소멸되어 새롭게 바뀔 것이라는 견고하고 줄기찬 확신을 갖고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첫 번째 금요일이 부활의 날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p.131).’ 이 책의 중간쯤에 무게감 있는 하나의 단어 ‘십자가.’ 나로써도 읽으면서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그 십자가, 하지만 그 영광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부분이었다. 감사하다. 할렐루야.

  ‘신앙은 단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만큼 강할 뿐이다. 신앙의 효험은 우리가 믿는 강도(强度)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믿는 그분이 신뢰할 만한 분인가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이다(p.160).’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경험하는 세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그것들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p.169).’ 라고 말하며, 경험이 가진 의심이라는 한계성을 넘어 믿음을 가질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과격하고 고독한 낭만주의자로 홀로 의롭게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도록 돼있지 않으며, 또 그렇게 부르심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한 공동체를 이루는 하나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처럼 도시라는 심상은 신뢰할 만하고 참된 복음주의의 영성에서 결코 뽑아버릴 수 없는 기초를 가리키는데 유용하다(p.190).’ ‘그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영화롭게 되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나아가 긍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또 그것이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구원이라는 목적에 비추어 비판받아야만 한다(p.202).’ 도시와 교회를 비교하며 설명하고, 도시가 곧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죄의 권세를 부수시고 정죄를 말끔히 없애버리실 수 있으며, 나아가 평온한 양심과 마음의 평강을 허락하셨다는 통찰을 선포하는 것이다. 비록 죄가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p.24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재창조될 우리의 장래 모습에 관하여 품고 계신 환상과 의도 그리고 약속을 반영하는 지위를 우리에게 부여하신다(p.264).'

  이신칭의 교리에 관하여는 ‘의롭다 여기는 데 기초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지, 우리의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수단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교리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교리이다(p.284).’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성화) 사이에는 결코 뗄 수 없는 연관이 존재함으로 인해, 거듭남과 성화의 필연서이 확인된다(p.294).'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인간의 성취나 공로를 통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물로 시작된 것임을 확인 해준다. 그러나 그 삶이 일단 시작되면, 계속되어야 한다. 지속되는 부분이 바로 성화이며, 바로 그 성화의 과정을 통해 성령이 일하심으로써 우리 내면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훈련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런 성화의 과정에 우리가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훈련으로 인해 의롭다 여기심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려는 우리의 의지로 인해 도움을 얻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 갈 수 있도록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틈새들을 그분께 내어 드리게 된다(p.299).'

  그리고 결론에서는 ‘종교개혁 영성은 우리 신앙의 뿌리로 돌아가려는 도전을 대변하고 있다(p.306).’ ‘기독교 신앙을 주관성을 깨달은 개인들과 관련지어주는 것이 종교개혁 영성의 중심 특징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실재(實在)가 되지 못한다면, 신학은 자살 통보서를 쓸 수도 있었다(p.309).’ ‘종교개혁은 그처럼 신선한 기풍을 되살리는 교정 작업에 필요한 하나의 본보기와 자원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정결케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아픔 역시 우리를 깨끗케 한다(p.313).’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의 근본 사상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 직면해 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그의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 뿌리로부터 도전을 받아야만 하며, 나아가 자신이 갈라져 나온 반석을 응시해야만 한다. 그 복음주의는 중대한 지식과 영혼의 양식에 굶주려 왔기에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p.314).'


  이상에서 살펴본 ‘종교개혁시대의 영성’은 내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우리의 교회는 한 동안은 방언은사사역만을 고집하더니, 또 한 동안은 치유은사사역만을 고집하더니, 경영을 전공한 목사님들의 인기를 끌고, 심리학에 관련된 갖가지 신앙서적(?)이 난무하고, 무엇인지 도구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교회를 리더 해나가는 교계의 지도부가 불안하기만 하였다. 지금까지 와서는 제자훈련이 전부인 냥 이야기하는 부류도 있었지만, 훈련이 전부가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는 많은 선교 단체와 교회가 그 증거가 되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마틴, 칼빈, 츠빙글리의 사상에 대한 통합정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부분이 인용되었다. 아마도 저자는 종교개혁시대의 정신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적용할 참이었던 것 같다. 책의 의도에서도 나왔던 바, 종교개혁시대의 영성이 이 시대에도 중요하며, 필요하다는 말을 역설하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 책을 읽으면서, 여전히 나도, 이 한국 교계도 분명히 정해놓지 않은 틀 속에서 임의대로 자지우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분명한 철학은 분명히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철학이라고 말한 데에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을 낮게 취급하려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은 철저히 복음주의를 표방하며, 복음보다 사람이 우선시 되었던 천주교를 비방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성경 앞에 서야 했으니, 얼마나 더 성경적이겠는가. 철학이라고 말 할 때는, 가치관을 포함하며 그리고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가치관, 철학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한 가지만을 더 언급하고 싶다. 과연 현 시대와 종교개혁시대는 같은가? 복음 앞에 서는 일에는 모두가 죄인이기에 같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와 공동체로 볼 때 우리는 많은 복음주의 움직임이 실패한 사실을 그동안 지켜봐왔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하등 능력이 없다. 인간의 공동체는 해가 달라질수록 또 다른 희귀병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 복음이 시대 위에 있다는 식의 표현들로는 해결책이 되기 힘들다. 성경 속에서는 시대적인 배경을 감안하고 쓰인 부분들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운동이 동일함만을 추구한다면 독자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뿌리도 없이, 교회를 지키는 많은 청년들과 사역자들이 그 뿌리의 모양이라도 알아, 회복되어졌으면 좋겠다. 그 영성의 뿌리 역시, 루터가 말 한대로 십자가여야 한다. 그 십자가 도시 곳곳에만 세워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각자 각자의 마음에서도 빛을 밝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