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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레이 <칼빈의 성경관과 주권사상> 요약

존 머레이 <칼빈의 성경관과 주권사상> 요약


'존 머레이의 노골적인 칼빈 옹호'라고 불려도 될만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주: )'는 제가 단 주석입니다.


책 정보: 원제<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기독교문서선교회, 나용화 역, 1976년 9월 30일 초판 / 읽은 책은 1990년 1월 15일 발행된 4판


    1. 존 머레이(John Murrey)의 생애와 사상


13쪽 그는 철저하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힘 쓴 보수주의자였다.


(프리스턴 신학교가 좌경화? 된 후, 메이첸, R.D.윌슨, O.T.엘리스 등이 신설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옮겨 조직신학을 가르쳤다고 함)



    제1장 칼빈의 성경관


21쪽 그러므로 이 차이(주: 성경 속에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언급)는 복사자들(librariorum)의 실수 때문인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없었기에 누가가 그것을 인하여 헬라어 성경을 읽는데 익숙해져 있던 이방인들을 당황케 한 일이 없었다.


24쪽 오히려 그는 사도들이 이런 사소한 것이 정확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취지로 영감받은 저자들의 습관만을 유의하였다. 


25쪽 유전과 관련된 오류에의 가능성은 성경으로 문서화되는 것(inscripturation)을 불가피하게 해 준다. 그리고 [천국교리](Coelestis Doctrina)의 문서화는 인간의 나태와 오류와 오만불손으로부터 그것을 보존해 준다. 


28쪽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께 대한 것과 동일한 경외심을 가지고 경외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유래되고 인간적인 어떤 것도 혼잡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31쪽 브리그스(Briggs) 박사는 (중략) "칼빈의 경우 성경의 무오성은 오류와 양립한다"(the infallibility predicated of scripture is, for Calvin, consistent with the errors). (중략) 그런데 이 두머르그(Doumergue) 역시 칼빈이 여자적 축자 여감론(literal, verbal inspiration)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33쪽 환언하면, 칼빈은 그가 말하고 있는 교리를 성경 자체와 동일시 하고 있다. 


33쪽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경 저자들이 언제나 신적 충동에 의하지 않고는 자의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는 어떠한 자의적인 말씀도 없다. 


34쪽 에베소서 2:5에서 칼빈은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는 구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다른 사람이 혹시 이것을 삽입했는지 그 여부를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하등의 어색한 점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이 바울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부담없이 받아 들인다." (중략) 절대로 문제삼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주: 응?)


35쪽 즉 그 무식한 독자에게만 그 오류의 책임이 있는 것이지, 히브리서의 원 저자에게는 전혀 과오가 없다. 그렇다면 왜 칼빈은 이것을 무식한 독자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원 저자의 정확성에 대해서 크게 열심을 품고 있는 까닭이다. 만일 두머르그가 주장한 대로 칼빈이 단어들에는 관심이 없고 영적 교리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무식한 독자의 소행을 깊이 생각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고 그가 오류라고 간주한 것을 곧바로 성경 원 저자의 소행으로 돌려 버렸을 것이다. 


39쪽 우리가 지금 아는 대로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이 사건을 서술할 때 연대상의 순서를 꼭 지킨 것은 아니다. 그 점을 칼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 형식의 문제이지 축자 영감의 문제는 아니다. 


42쪽 칼빈이 뜻하고 또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만 사도 바울이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합한 특별한 진리나 적용과 관계되는 구약 성경에서 뽑아내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칼빈에게는 구약에 나타난 진리와 바울의 해석이나 적용에서 천명된 진리가 다같이 전체 진리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데 중요하다. 그 모든 것은 전부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영적 교리에 속한다. 


45쪽 칼빈은 복사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들을 충분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몇몇의 경우에 있어서 그는 이러한 오류들의 원인과 그 근원에 대해서 결정적인 판단을 내린 일이 있다. 칼빈의 이 열심은 성경 저자는 성령의 필기자였기에 결코 그러한 오류들을 범할 수 없었다고 하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원본의 무오성에 대한 그의 관심과 상통한다. 


47쪽 모든 기록이나 역사의 세부적인 데까지 그 표준을 '지나친 정확성'(the criterion of meticulous precision)에 두고서 이를 성경 무오의 필수적 척도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48쪽 우리가 제멋대로 성경 무오성의 표준을 지나치게 꼼꼼하고 현학적인 종류의 정확성에 두게 될 때 그러한 정확성을 결여한 예들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언어와 관습의 일반화된 여러 유형들대로 어떤 말은 완전한 신빙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현학적 정확성은 결여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성경은 현학적인 것으로 인하여 그 자체를 우매한 것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49쪽 왜냐하면 칼빈과 같은 다작의 저술가는 종종 그의 중심 사상이나 교훈의 지배적인 진의와는 약간 상이한 견해나 입장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2장 칼빈과 성경의 권위


54쪽 칼빈은 성육신하신 성자가 신적 계시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기독교강요와 주석들을 보면 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이고, 그리스도를 앞세워 놓고 있다. 


57쪽 기록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은 성문화된 말씀(the inscripturated Word of God)이다. 


58쪽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입이며, 그러기에 우리가 자주 발견한 대로, 성경은 곧 우리가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62쪽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계시이다. 또한 그는 우리 인간에게 계시를 주신 분이시다. 그가 주신 계시는 그가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시는 동안에 스스로 증거한 증거와 성부께서 음성으로 그를 증거한 증거와 구별지어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를 그가 하신 말씀이나,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한 성부의 음성과 구별하여 생각하려는 것은 순전히 추상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은 영감된 것이요 무오한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한다면 성육신하신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의 무오성이든가 그의 계시의 중심성과 최종성은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65쪽 우리 주님과 사도들의 증거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어떠한 축자적 계시의 양태도 성문화된 것보다 더 권위가 있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제공해 주시기를 기뻐하신 바 계시의 어떠한 양태도 성문화된 계시의 양태보다 더 확실하고 견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71쪽 하나님의 저자권은 선행 사실로서 우리의 확신에 의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에게 인식을 갖도록 해주는 것에 의해서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 권위를 부여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저자권이며,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 이 저자권이 결과된 것은 결코 아니다. 


74쪽 "즉 우리가 거짓에 의해서 속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또한 의심스러운 것들 때문에 정신이 헛갈리지 않도록 성령은 우리에게 판단력과 분별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내적 증거의 기능이란 [내적]이란 말이 뜻하고 있는 대로 우리의 마음이 성경의 본래적으로 성경된 것에 합당한 확신(persuasion, assurance, conviction)을 갖도록 하는 작용이란 사실이다.


74쪽 성경과 성경이 본래적 신성(intrinsic divinity)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의 본래적 성격에 관해서 칼빈은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다. 



    제3장 칼빈의 하나님 주권사상


83쪽 하나님의 주권을 주제로 한 글들 중 어떤 것도 사상의 깊이와 서술상의 경건과 표현의 웅대함에 있어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1권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세 장(16-18장)을 지금까지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84쪽 그리고 많은 개혁 교회 안에서 감사와 인종(주: reasons and results)  소망에 관한 상투적인 통용어가 된 신학적 용어를 만들어 준 사람은 바로 칼빈이다. 


86쪽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마음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미궁이다"라고 한 칼빈 자신의 충고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예정에 관한 모든 생각을 백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칼빈은 말하기를,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꼭 알아야 할 것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외에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이것을 우리의 거룩한 규범으로 삼자. 즉 주님이 그의 거룩한 입을 다무실 때 우리 또한 길을 멈추고 더 이상 나가지 않도록 하자"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92쪽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은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서 기쁘게 만든 주권적 차별에서 그것의 설명을 찾으며, 차별의 국면에서 유기자의 간과와 거부, 그리고 부과된 이질의 운명은 구원에 이르도록 택정된 자들의 선택과 상호 관련이 있다고 하는 칼빈의 입장에 관해서 어떠한 의심도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데 충분하다. 최고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선택에서와 마찬가지로 유기의 경우에서도 엄격하게 군림한다. 


94쪽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의근거는 칼빈이 주장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오직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유기자들이 당하는 파멸의 근거는 죄, 오직 죄일 뿐이다. 


97쪽 칼빈은 유기 가운데 있는 사법적 요인을 확언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바 그 저주에 처해지게 되는데도, 다른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되는 바, 그 이유는 단순히 그리고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라는 사실을 칼빈이 고려에 넣고 있음이 틀림없다. 결과 죄과란 집행된 정죄의 근거이긴 하지만, 그것은 선택과 유기라고 하는 차별의 이유는 아니다.


100쪽 섭리란 일반적 동작이나 감독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에 의해서 통치되고 그의 현존하는 손길에 의해서 지배되는 모든 사건들에 있다고 하는 칼빈의 주장일 것이다. 


101쪽 우연이나 요행이란 단어는 기독교 신자의 사전에 있을 수 없다. 세상의 제반사는 흔히 그것들의 질서, 이유, 목적, 그리고 필연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숨겨져 있어서 인간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인간들에게 우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에게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온 까닭이다. 


103쪽 어떤 점들에 있어서 칼빈은 하나님을 조성자, 또는 원인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다.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들을 타락한 마음에 내어 버리셨고, 또 그들을 악한 정욕 가운데 내어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자신의 의로운 보복 조치의 제일 조성자이기 때문이다."


103쪽 칼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조성자이시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못지 않게, 또한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라는 취지로 강력하게 말한다.


105쪽 "인간들은 하나님을 전혀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서는 사악한 것만을 발견하고, 한편 하나님에게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합법적으로 이용하시는 것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악한 인간들의 사악한 의지와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 간에 일치하는 접촉점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