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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방학 동안 밀렸던 일기, 어떻게 썼나?

방학 동안 밀렸던 일기, 어떻게 썼나?


초등학교(80년대이니 당연히 국민학교였다) 저학년 시절에 가장 내게 버거운 과제는 '일기 쓰기'였다.  방학이라는 특권 속에 숨겨진 '일기 쓰기'의 악몽은 늘 나를 괴롭혀 왔다.  매일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정작 매일 쓰려고 하면 꼭 '글발(?)'이 서지 않아 포기 하게 되었었다.  결국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무장해서 40여 일의 방학생활을 견뎌냈다. 


방학 중에 소집일이 있었다.  꼭 한 번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일기는 잘 쓰고 있고? 방학 숙제는 잘 하고 있고?"라고 물으며 우리들을 긴장시키셨다.  개학 이전에 공포의 대상이 소집일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소집일이 없었더라면 정말 나는 즐겁게 방학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소집일 이후에도 숙제는 시작하지 않는다.  소집일 전후로 우리는 정보공유를 시작한다.  풀리지 않던 수학난제?도 그렇게 정보공유와 선배들?의 족보로 해결한다.  방학숙제라고 해봐야 '탐구생활'과 몇몇 견학이 전부였다.  그것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창작(?)의 레벨에서 저급으로 취급되었다.  왜냐하면 그저 손으로 복사와 붙여넣기를 하는 수고로움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기쓰기'.  나는 주로 3일 전에 밀린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 "저 공부해요."라고 선포했었다.  그럼 어머니는, "숙제 한다고 말해야지."라고 핀잔을 주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나는 일기장을 편다.  


1단계 날짜와 날씨를 적는다. 

날짜와 날씨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정말 창작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다만 주요한 태풍과 장마를 중심으로 날씨를 정리해 간다.  이 날씨는 매우 중요하다.  선생님들은 아마도 날씨를 통해 우리의 진실 혹은 거짓 여부를 판단했을 것이라는 귀동냥이 있었다.  


2단계 주요 이벤트를 기록한다.

잔치, 결혼식, 제사 등의 집안일과 동네 사건 사고 등을 집대성해 기록 한다.  물론 창작의 정도는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 창작이고 무엇이 사실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3단계 주요 이벤트에 관련된 내용을 확대 기록한다.

예를 들어 수영장에 다녀오면, 수영장에서 놀았던 이야기 하루, 수영장 다녀와서 있지도 않았던 눈병으로 며칠을 아팠던 이야기로 이어 간다.  그리고 결국은 다음부터는 수영장 같은 데는 안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으로 끝!

 

4단계 누나의 도움을 요청한다. 

역시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  다양한 창작의 주제들의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이쯤 되면 70-80% 완성된다.


5단계 날씨에 맞춰 감정을 묘사한다.

사실 그 옛날,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무슨 특별한 일이 많았겠나?  결국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모든 일상다반사를 내 감정에 투영시키어 묘사하는 훈련을 해왔다.  모든 날씨는 하늘님이 내 인생에 대한 간섭이 아닐 수 없었으며, 이것은 희로애락, 권선징악과 같은 삶의 소소한 내용이 되었던 것이다. 


6단계 그래도 며칠 남으면 어떻게 하나?

내 비밀 얘기를 적는다.  물론 창작으로 적는다.  근데 정말 놀라운 것은 선생님들이 내 비밀 얘기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상담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을 알았던지, 외면한 것이 틀림없다. 


7단계 완성된 일기를 감상한다. 

혹시 너무 과장이 심하지는 않았는지?  창작은 중복되지 않고 다양하게 잘 되었는지?  퇴고에 가까운 노력이다. 



이렇게 고생하며 쓴 일기는 개학 후 첫 날, 선생님의 책상에 올려진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기를 내지 않은 아이들이 맞는 모습을 보며, 3일 간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았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공감할 텐데.. 그 일기 다 어디 갔어?  다시 읽고 싶어지니까 하나도 없어. 흙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