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제자도(Discipleship) -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브루더호프 공동체
‘형제들의 처소’, 나치가 집권하면서 영국 이어서 남미 파라과이의 정글로 망명하며 살아남은 신앙공동체. 현재는 전 세계 9개국에서 2,500명가량이 살고 있다. 요한 하인리히는 이 비폭력, 무소유,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에 자라났고, 말씀의 종으로, 장로로 섬겼다.
이 책은 제자도-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를 매우 간결하게 쓴 책이다. p.12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 책과 유사한 책이 있다. 그것은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예수님을 바로 따르기 위해 '신성한 삶'을 살도록 추구하는 태도는 바로 '수도원' 생활을 추구했던 아 캠피스와 '공동체' 생활을 추구했던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가 닮아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신학에 대한 불편함을 내색하는 것이나, 세상사에 대한 경계를 보이는 측면에서, 또 여러 가지 신앙의 기본적인 주제들을 다시 언급하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속사람이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p.21
우리가 공의와 사랑에 눈 뜨게 한 것은 성경이다. 하지만 그 성경을 알고, 또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가능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속사람의 경건만 추구할까봐 걱정이었지만, 후에는 첫 믿음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좋은 직업을 구하거나 100만원을 달라며 이기적인 요청을 하는 것은 예수의 길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실 때 ‘무엇’은 아버지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요14:13) p.28
공동체를 지키는 큰 힘은 그 누구도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브루더호프는 이와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약속에 매료되어 있지만, 철저히 회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종종 예수님의 가장 큰 적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종교인이라는 사실은 비극입니다. p.30
회개는 자학이나 정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돌이킴과 받아들임입니다. 즉 부패와 맘몬주의에서 돌이키는 것, 하나님나라의 방식에 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p.31
제자도는 완전한 헌신입니다. 제자도는 사랑이라는 대의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온 마음, 온 생각, 시간, 에너지, 재물을 포함한 삶 전체 말입니다. 미적지근한 기독교는 믿음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p.37
분명한 적으로 설정했다. 모호한 악의 영이 아니다. 그것은 맘몬과 개인주의적인 신앙이다. 이것을 부술 때만 제자도는 가능하다.
우리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라는 말씀에 압도되어야 합니다. p.41
대부분은 개인 구원을 설명하느라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를 강조한다. 이부분이 아무리 문법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곧 사랑의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의 메시지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p.44
그리스도의 탄생은 끊임없이 다시 이루어집니다.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마리아의 믿음으로 그분이 받아들여지는 곳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함께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믿으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에게 증명할 것입니다. p.48
나 역시 개신교인이라 ‘마리아’라는 말이 거슬리지만, 마리아를 신약시대의 믿음의 첫 세대라고 생각되는 마리아를 혐오스럽게 보는 것이 더 이상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리스도가 지금도 우리의 공동체 안에 오실 수 있음이다. 이것을 믿는다.
우리의 원칙은 서로 사랑,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그리고 은혜에 가려져야 합니다. p.51
얼마나 교조주의적인 태도로 많은 사람의 신앙 없음을 증명하며 살아야 할까? 난 사랑으로 그 구원을 얻었음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와 고난을 약속하셨습니다(요15:20).
아, 진짜 예수님! 사, 사, 사, 사랑합니다. 휴우!
스포츠, 사업 문제, 돈 걱정이 마음을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들은 분명 ‘세속적’이며, 산만하게 만드는 유혹들입니다. p.55
이 부분에 대해 나는 물음표를 달았었다.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는 그것이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다시금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나를 위해 뛰어왔다. 공동체성이 무시된, 개인적인 취미 생활의 극단적인 추구라면 그것은 '세속적'이다. 즉 사랑이 없고 쾌락만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랑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p.67
사랑이 없다는 것이 죄다. 그 죄는 반대로 간음, 살인, 사기 등의 죄들을 발생시킨다. 사람과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수음에 탐닉하면서 아무런 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을 상하게 합니다. 그는 악한 영이 살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p.80
성에 대해 개방적일 필요를 느끼지만 기독인들의 상당수는 관음과 수음에 중독되어 있다. 그것이 나쁜 이유는 행위자체보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이성의 벗은 몸을 상상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독은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쾌락이다.
듣기에는 좋지만 진실하지 않은 말이 아니라 듣기 불편하더라도 진실한 말을 하십시오. 불친절한 말을 했다면 언제나 미안하다고 할 수 있지만, 위선은 특별한 은혜가 없는 한 영원히 해를 끼칩니다. p.99
아 진짜 좋은 말이다. 나는 더 불친절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선의 해악성이다. 그것은 죄이다.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것이 이 공동체의 중요한 규칙 중의 하나다.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좋은 비결이라 하겠다.
그리스도는 두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모든 권리와 힘과 재산과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교회를 보냅니다. p.103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보내셨을까? 내가 주인 삼은 것들 때문에 교회는 아직 '이미' 하지만 '아직'이다.
예수님의 길은 완전한 무소유를 뜻합니다!(마 19:21) p.110
반갑다. 친구야! 재물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늘 무소유다. 하나님의 것을 이웃들에게 흘려보낼 마음이 충분할 때 예수님의 길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p.123
아, 진짜 멋진 말이다. 가장 낮은 사람이 예수님 아니시던가? 그 분이 하셨기 때문에 믿을만한 길이다.
방언 없이는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중략) 우리가 철저히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성령도 받지 않은 겁니다. p.130
방언을 주네마네 수작 부리지 말고, 회개부터 하자. 성령의 은사 중은 제일은 사랑이다. 성령의 열매 중 제일은 무엇일까? 그것도 사랑이다. 이것은 진리!
형제나 이웃 또는 원수를 용서하지 않은 채 기도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p.134
용서. 평화. 이것보다 왜 보수 기독교는 영적 전쟁을 강조해왔을까? 내가 용서하거나 평화를 주다가 질 것 같은 착각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면서? 용서 그리고 평화는 전쟁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양보가 차이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회개와 깊은 화해와 회개의 열매로 자라나는 만장일치를 양보가 대신하게 되고, 결국은 심각한 악에 물들게 됩니다. p.144
양보와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 없다.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이고 사랑이다. 그것을 양보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아버지의 아내와 살고 있는 남자에 대해 말하는데, 바울은 그런 죄에 대해서도 제명이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p.148
제명이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제명된다면 그 사람은 돌아올 기회를 사회적으로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죄에 대해서는 왜 용서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가? 아마도 저자는 공동체의 한계성을 염두하여 바울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명마저도 하지 않으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일 것이다.
질병은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프더라도 당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p.197
치유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치유은사 집회에서 은사를 가졌다는 목사가하나님보다 돋보이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는지 묻고 싶다.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 그 앞에 낮아지는 것이다.
혈과 육에 맞선 싸움도 아니고,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에 맞서서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어둠의 힘과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겁니다. p.207
이거다. 영적 전쟁. 죄성과 싸우는 의로움. 사람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는 태도. 그러나 그 죄를 발견하고도 침묵하는 것은 싸우는 것과는 다르다.
로마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도시의 가난한 사람을 먹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첫사랑 안에 살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첫사랑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합니다. p.222
그래, 진짜 사랑은 마음 속, 교회 속에서 죽은 듯이 있지 않는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
폭력적인 격변의 시기에는 극우파가 판을 칩니다. 동시에 높은 이상을 가지고 공의와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우리는 방관하고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가고, 정의를 위해 삶을 내주는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과 경의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권리에 기초한 정의보다 더 깊은 정의가 있음을 압니다. 그것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p.225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고자 하는 열심이 정의를 추구하는 열심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어린 양을 이리에게 보내는 것처럼 사도들을 보내셨습니다. (중략) 어떠한 강요도 압력도 악의도 없었고, 공격적이지도 않으며, 자유 의지를 짓밟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적 선교의 특징입니다. p.235
사도는 예수님과 같이 그들의 십자가를 위해 갔다. 우리는 그들이 십자가 지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은가? 공동체의 이러한 이해는 공동체가 사회 속에서 사랑의 메시지로 살아내게 한다. 선교가 종교적 지배가 아니라 사랑의 전달이 될 때, 거부감은 사라진다.
개인의 구원은 아주 중요하며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경험하고 구속을 받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더 위대합니다! p.274
하나님 나라의 종 되었을 때, 난 자유롭다. 그저 나의 구원을 확인하기 위해 그분과 친밀함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육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한 삶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법에 맞게 살도록 만들어 간다. 성령님이 그렇게 하시며, 우리는 그럴 때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친밀한 권위자』는 존 스토트를 친밀한 편지로 바로 세워준 에릭 내쉬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그 책에서 에릭 내쉬의 친밀한 편지들을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공동체 제자도』에서 나는 친밀한 권위자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제자입니까?』를 감명 깊게 읽었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제가 말하는 제자도는 바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능력을 믿었다. 이 책도 회개도 주의 사랑으로 이뤄지고, 구원도 그렇게 이뤄진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제자도는 사랑이다.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가 지은 『공동체 제자도』의 본 제목은 Discipleship이다. 제자도를 공동체 안에서 해석하려는 태도 때문에 이 책은 한국에서 공동체 제자도가 되었다. 요한복음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도는, 교회는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 앞에 서로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자도는 공동체로만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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