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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요약

서론


25쪽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사도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명하는 형식을 취하여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1.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위한 배경과 전제


31쪽 아담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부왕입니다.


31쪽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부왕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32쪽 신학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32쪽 이 죄는 아담(인간)을 사단의 약속대로 하나님같이 되게 한, 즉 신격화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비인간화하게 하고, 사단의 종으로 타락하게 했습니다.


37쪽 "영생"이란 원래 히브리어 "오는 세대(세상)의 삶"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은 단지 시간적으로 끝없이 길어진 영원한 삶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오는 세대," 곧 구원의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란 뜻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므로 시간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늙고 병들고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사는 것도 포함하지만, 또 하나님의 전지하신 지혜에 힘입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불안이 없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힘입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도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힘입기에 갈등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0쪽 이런 인간에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아버지, 즉 창조주에게로 돌아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약속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떠난 인간에게 돌아오지 말라고 저주하지 않고 용서하고 화해해서 아들로 받아 상속자의 위치로 회복시키고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41쪽 "언약"이란 하나님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하겠다고 약속해주는 것입니다. 


43쪽 구약 시대 말기의 묵시 문학에서부터 점차 "두 세대" 사상이 발전해서 랍비문학에서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전문 언어로 정착되었습니다.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여 인간들을 통치하되, 죄악을 저지르게 하고 죽음으로 품삯을 주는 식으로 통치하는 시대인데 반해, "오는 세대"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의)로 회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게 하는 통치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오는 세대" 사상은 내용상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57쪽 탕자의 비유는 사단의 속임수에 꾀어 자신의 결핍에 떨어진 창세기 3장의 아담(인간)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곧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아빠 노릇해주심에로 돌아와야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다시 자신의 자녀들로 회복시키고 풍요로운 잔치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복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자신의 자녀들로 회복시켜 "상속자"들이 되게 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는 풍요와 기쁨과 사랑의 "잔치"를 베푸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적 생명, 곧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62쪽 예수께서 하나님의 힘으로 이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귀신들린 자를 해방시켜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는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이미 실현되고 있는 증거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예수의 축귀와 치유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단의 통치를 꺽고 자신의 구원 통치를 실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일꾼(agent), 또는 하나님의 나라의 담지자(bearer)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64쪽 예수의 치유는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실현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치유는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실제화(actualization)요", "시위(demonstration)"이며, 그것에 대한 "해설(commentary)"이요 "예시(illustration)"입니다.


69쪽 이와 같이 오순절 신학은 신앙을 미신화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면, 개혁 신학은 구원을 관념화하고 미래화만 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자 모두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둘 다 성령의 치유 역사를 육신의 병고 제거에만 제한하여 너무 좁게 이해한 데서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88쪽 예수는 안식일에 이 사람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가 벌써 실현되기 시작되었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이 희구하는 종말의 참 안식이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안식을 가져오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시위하기 위해 예수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오는가?


90쪽 그때 사단의 나라를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여, 미래의 "완성"을 향하여 벌써 "출범"한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92쪽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함께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이루다," "확장하다" 등의 동사들을 예수는 쓰지 않았습니다. 


94쪽 전능자로서 초월자의 힘을 가지고 우리의 내재 안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야 드디어 구원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초월자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초월성과 은혜성은 구원의 두 조건들입니다. 


100쪽 그는 유대 민족주의를 신랄히 비판했으려니와 어떤 정치, 사회, 경제적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100쪽 그는 아담의 특권과 타락의 특별한 상속자인 이스라엘을 사단의 나라로부터 구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시키고, 그들을 통하여 온 열방들을 죄와 죽음의 사단의 통치로부터 의와 생명의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이전시키려 한 것입니다. 


101쪽 겨자씨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연의 확대를 말한다면,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가져오는 질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103쪽 씨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기 때문에 아무리 핍박과 저항이 있어도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103쪽 조그만 누룩이 큰 반죽덩이를 변화시키듯이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가치관, 윤리,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기독교 문명에서 노예와 여성의 해방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의 인권이 존중되며, 그 바탕 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05쪽 예수는 설령 열심당의 성전이 성공하여 이스라엘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들 그것은 로마 제국과 유대 민족이 자리바꿈만 하는 것이지 온 인류를 위한 정의와 평화와 자유의 확대가 아닐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06쪽 예수는 이른바 "해방신학"에 동조하지 않은 것입니다. 


108쪽 적극적인 제자도는 소극적인 경건주의(또는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의 반대입니다. 


108쪽 예수는 하나님 나라(통치)가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온다고 보았습니다. 


109쪽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반대말은 우상숭배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엄중히 경고한 우상숭배의 형태는 맘몬 숭배, 즉 재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태도입니다. 


110쪽 사단은 우리에게 돈을 많이 벌어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도록(곧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도록) 유혹하고, 그러기 위해 이웃을 착취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아빠 되심에 의지하여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며 또한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마 6장).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존의 매 순간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장과 사단의 주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113쪽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며 (곧 사단의 나라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그리하여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한 "수확"의 형태는 아니고 "첫 열매"의 형태로나마) "오는"(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서 누누히 강조한 바와 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5.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예수의 의도


118쪽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 속으로 들어오라는 부름 또는 초대였습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나라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19쪽 구약은 가끔 이스라엘(또는 야곱)을 하나님의 "집"(또는 "전")이라고 합니다. 그의 백성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처지, 즉 성전인 것입니다. 


121쪽 그러나 예수는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자신의 메시아적 과업을, 문자적으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성전 건물을 건축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다윗 왕조가 이땅에서 반영해야 할, 그러나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하나님 나라(통치) 자체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123쪽 다윗 왕조가 반영하도록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통치) 자체를 실현하는 것을 자신의 메시아(즉 종말의 구원자)로서의 과업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완성된 통치 아래서의 구원을 약속하면서 지금 회개함으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일이며, 동시에 죄인들을 그의 백성(자녀)으로 회복시키는 일로서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이 창조되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는 그 공동체가 곧 진정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메시아로서 성전의 기능(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또는 자녀들로 회복시킴)을 완성하여 성전(하나님의 참 백성 공동체)을 건축하려 한 것입니다. 


  6.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128쪽 예수는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겠다고 나아오는 이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 (자녀들)이 되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지금 벌써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을 덕입어 살게 한 것입니다(주기도문). 나아가서 그들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에 참여할 것(곧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여 신적 생명, 영생을 얻을 것)을 보증해주고 그 첫맛을 지금 벌써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즐겨한 것이 바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예수적인 행위입니다.


134쪽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에게 '사단의 통치로부터 해방된(즉 죄 용서된/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덕입어 살게 해 주겠다, 그의 신적 생명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고, 그런 복을 받으라는 "초대"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이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이 "약속"을 성취하여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 (자녀들)이 되게 하는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약속"한 바를 그의 죽음으로 "성취"해주려 한 것입니다. 


    2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7. 예수의 죽음


141쪽 예수가 새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주장한다면(성전 죄목), 그는 분명히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다윗의 아들(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141쪽 대제사장이 보기에 빈약한 인간 예수가 메시아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한 것이 참람죄가 아니라 성전을 때려 부수겠다고 한 것이 참람죄였다는 것입니다. 


141쪽 구약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부수어버리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죄, 즉 참람죄를 범한 것입니다. 


143쪽 신명기 21:23에 있는 모세의 법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려 처형된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되게 함으로써, 예수가 거짓 메시아로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여 하나님의 법(신 21:23)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라고 온 유대 민족에게 드러나게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예수의 운동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8.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복음의 기원


150쪽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약속'과 그의 죽음을 통한 그 약속의 '성취,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한 그 성취의 '확인,' 이 세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들은 상호간 해석을 도와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의 중심은 그의 죽음입니다. 


150쪽* 그러므로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같은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될 구원을 향하여 가면서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그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도들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이미 성취된 그 구원을 뒤돌아보며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즉 관점의 차이 또는 구원사적 시점의 차이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9.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157쪽 그리스도의 죽음은 피조물들의 모든 문제들, 그 문제들로 현상화하는 근본 문제, 곧 죽음을 해결하는 창조주의 사랑의 나타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복음,"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157쪽 믿음은 근본적으로 복음, 즉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것을 축약하여 "그리스도를 믿음"/to believe in Christ이라고 함), 이 받아들임은 우리를 우리들의 대신이요 대표로 죄에 대해 죽고 신적 삶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 안에 내포시켜("그리스도 안에"/in Christ), 하나님 앞에 그의 됨됨(what he is)이 우리의 됨됨이 되게 하고, 그가 하신 일(what he has done)이 우리가 한 일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에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167쪽 성경에서 "의"란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복잡한 관계의 망 속에서 사는데, 모든 관계는 그 관계의 참여자들에게 의무를 지웁니다. 하나의 관계의 참여자들이 그 관계가 지우는 의무를 다 하면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167쪽 관계 속에 있는 참여자들이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면 관계가 원만해지는데, 그 원만함을 "샬롬"(화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참여자들은 "불의"하고, 그 관계는 갈등에 빠지고 맙니다. 


173쪽 개신교가 인간은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과 그러기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전반부를 잘 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전반부의 구원의 서술(indicative)은 후반부의 윤리적 명령(imperative)을 구조적으로 동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billige Gnade/cheap grace;D. Bonhoeffer)로 만들고 무표화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indicative)은 "그러므로 의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요구(imperative)와 함께, "그러므로 이제 의인으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도 포함합니다.


181쪽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꼭 "의인됨"의 범주로만 선포할 것이 아니라, "화해"의 범주로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서로에게 화해시켜야 하며, 심지어 인간들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가면서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자연 환경과도 화해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화해"의 구원이 개인들 간에, 사회 공동체 내에서, 민족들 간에, 그리고 온 우주적으로 실재화하게 해야 합니다. 


194쪽 우리는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단의 주권의 요구, 즉 맘몬(재물)을 많이 쌓아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라, 그러기 위하여 이웃을 착취하라는 요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요구, 즉 하나님께 의존하고 그래서 이웃을 섬기라는 요구의 갈림길에 놓입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고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부르짖으며 그의 주권의 요구를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의존은 사실상 그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신뢰하지 않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지혜와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제시해주시는 길을 택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의 꾀(사실 극히 부족한 지혜)가 제시하는 길을 택하곤 합니다. 곧 불순종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의자하라(곧 우리에게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라)는 사단의 요구를 뿌리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에 순종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의 사회는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 노릇하는" 사단의 나라가 아니라, 만인이 만인을 섬기는 정의와 평강의 하나님 나라가 더욱 실현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함과 그에 대한 순종,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들입니다. 이 둘을 분리하는 신앙, 즉 하나님께 복을 빌면서 그에게 순종은 하지 않는 신앙은 미신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신앙도 미신입니다. 그런 미신들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가져오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197쪽 교회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 위에서의 임재이신 그의 영, 곧 성령의 보호와 인도와 힘주심을 받아 온 세상에 그의 주권을 실현해가는 "일꾼"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예수의 주권에 의존하고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확대해야 하고, 세상을 향하여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회개함으로 나와서 진정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고 촉구하여야 합니다(롬 1:5).

  이것이 교회의 "선교"인데, 이 "선교"는 물론 개개인의 회심과 주권의 전이를 촉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제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외 사랑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예수의 주권에 의자하고 순종하도록 촉구할 뿐 아니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제도들과 과정들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의 통치를 나타나도록 애써야 합니다. 


208쪽 사회 정의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인권이 짓밟히는 처지에서도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의인됨"의 구원론의 사회윤리적 함축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 것에 더하여, 누가복음식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구원의 통치가 어떻게 장애자들,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소외되고 핍박 받는 자들의 "치유"와 해방으로 나타나는가를 선포하고, 어떻게 교회가 그 "치유"와 해방의 구원을 실현하는 일꾼(agent) 노릇을 해야 하는가를 강조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복음을 요한계시록식으로 선포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물론 널리 퍼진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여 현실도피적 내세주의적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에 간단히 요약한 대로 핍박 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의 확신과 소망을 주고, 천황숭배의 우상숭배와 "대동아 공영권"의 거짓 "복음"에 굴복하고 현혹되는 것을 막으며, "예수의 증거"(하나님의 나라)를 순교를 무릎쓰고 신실히 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과거 30 여년간 한국에서 군부가 경제 성장이라는 달콤함 바빌론의 술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국민의 인권을 짓밟는 무단통치를 계속하였을 때, 여러 교회 지도자들은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나가 그 독재자들을 떠받드는 제사장 노릇을 할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앞장서서 조장하는 맘몬이즘의 우상숭배와 "세계화"라는 거짓 복음이 우리를 지배하려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갈등의 세계 속에서, 특히 한국의 상황 속에서 왜 복음이 특히 "화해"의 범주로 선포되어야 하는가는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